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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what Nov 03. 2024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

조금은 힘겹고도 어려웠던 기억들

부모님 슬하에 아들 둘을 두셨고, 나는 그 중 장남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조금 신중하고 내성적이었고, 동생은 조금 과감하고 외향적이었다.

아마도 장남과 차남의 피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나의 아버님은 가정에 소홀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 영향은 친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듯 하다.

친할아버지 역시 가정에 소홀하셨고 팔도를 떠돌아 다니며 사셨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친할머니도, 그리고 어머니도 남편없이 가정을 꾸리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조부모님들의 상황이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모님의 일은 비록 내가 어렸지만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 집에는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만 있었고, 늘 가정을 꾸리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만 계셨다.


그래서 어릴 적엔 가정 형편이 늘 좋지 못했다.

버는 사람은 한정적인데 쓰는 사람은 많으니 말이다.

나이가 찬 삼촌과 고모들이 제대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 늘 쪼들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집안의 상황을 알게되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게 조금 위축되고는 했다.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각종 비용을 제때 내지 못해 선생님께 불려가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다보니 선생님도 이후에는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세월의 흐름에 무릎을 꿇고 집안에 좋지 않은 내력을 심어놓으셨던 분들이 차례대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셨다.

친할아버지/친할머니, 아버지, 삼촌들, 고모들..


하지만 그 분들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때의 좋지않았던 기억까지 없어지진 않았고, 특히 어머니의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그 사실을 기억하곤 하셨다.

이제 그만 잊으시라고 말씀드려도, 그게 어떻게 쉽게 잊혀지겠나며 그러지 못한다고 하신다.


아무래도 나와 동생보다는 어머니가 그 오랜 세월동안 무책임한 가족들의 시달림에 몸서리를 치셨을테니 쉽게 잊힐리가 없는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다.

그걸 내 짧은 소견으로 이제 그만 잊으시라고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건방진 소리였다.


그냥 가슴속에 뭍고 가시다가 언젠가 본인이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놓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때가 아픈 기억들을 잊어버리는 시기가 될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가급적 그 시기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시절은 참으로 힘겹고도 어려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의 눈부신 희생으로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와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어머니, 부디 여생동안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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