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존감이 떨어지면 책을 읽어

- 스파이 글쓰기 1주 차 -

by 로오렌

그런 날이 있어.

되는 일이 없이 일진이 사나운 날.

세상이 나를 가로막는 것 같은 기분?


자주 가는 김밥집이 있어. 포장만 가능해. 앉아서 기다릴 공간도 마땅치 않고, 주차장이 따로 있지도 않아. 그냥 흔한 간판의 흔한 가게야. 속이 꽉 찬 김밥은 한 입에 먹기도 힘이 들어. 얌전한 자리에서 이 김밥을 먹어야 한다면 반 입씩 먹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오물거려야 할 거야. 눈웃음도 잊지 말아야 해. 입은 김밥을 씹어내느라 웃을 수 없거든.


아이에게 카드를 쥐어주고 김밥집 앞에 내려줬어.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나는 차를 돌려 대야 했지. 하필 김밥집 뒷골목에서는 몇 달째 빗물펌프장이 공사 중이야. 공사차량에 불법주차로도 부족해서 과일트럭 아저씨도 모퉁이에 자리 잡고 계시지. 세금 한 푼 안 내실 테지만 몇 년째 저 모퉁이로 출퇴근 중이셔. TMI야?

이런저런 과정은 생략할게. 나는 힘겹게 차를 돌려댔어.

당연히 김밥집 앞에서 나를 기다려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아.

혹시 아직 결제 중일까 싶어 김밥집 안을 살펴보는데 아이가 안 보여. 감사하게도 내부가 보이는 구조야.


아이가 사라졌어.


당황스럽긴 하지만 걱정되진 않아. 아이에게는 대기업의 통신망을 이용하는 휴대폰이 있거든. 한 번도 요금 체불을 한 적도 없고 게다가 웬만한 성인이 사용해도 괜찮을 스펙의 최신폰이기도 하지.


뒷좌석에서 징~ 소리가 울려.


맙소사. 아이가 휴대폰을 두고 내렸어.


여전히 당황스럽긴 하지만 걱정되진 않아. 사라진 아이는 255mm 사이즈의 운동화를 신거든. 아이의 집에서 가깝진 않지만 그래도 낯선 동네가 아니니 걱정할 일은 아니지.

솔직히 어이없긴 해.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2분 전에 김밥집에서 카드결제한 내역이 있어. 아이는 김밥을 샀고 그리고 사라졌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밥집 주변을 차로 돌아보기로 했어. 아슬아슬한 불법주차 구간을 지나쳐서 과일트럭 아저씨 구간을 힘겹게 통과했어. 다시 김밥집이야. 여전히 아이는 보이지 않아. 집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인데 아이가 보이지 않으니 당황스러웠어.

점점 다가오는 출근시간에 부담감을 느끼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혹시라도 아이가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더 돌아보기로 했지. 만나지면 집으로 태워 갈 참이었어. 빗물펌프장 공사 진입로를 지나서 과일트럭 구간에 들어섰어.


콰앙! 삑!!!!!


앞 차를 들이받았어.


오래된 빨간 경차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뒷 목을 잡고 내리셨어.


거지 같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거지. 빨간 경차와 마주 보는 빛바랜 파란 경차도 보였어. 과일트럭 아저씨 구간은 4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중심이거든. 불법주차 된 차들 사이의 공간은 차 두 대가 왕복할 수 없어서 빨간 차는 뒤로 빠지는 상황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때마침 나는 아이를 찾느라 운전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고. 어쨌든 나는 앞 차를 들이박았어.


우선 길이 복잡하기에 차를 뒤로 살짝 뺐어. 창문을 내리고 소리 질렀어.


"괜찮으세요? "


잘잘못을 따질 여력은 없었고 판단도 서질 않았어. 블랙박스를 확인한다던지 보험회사에 연락을 한다던지 전부 내가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지도 모르겠어.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거든.


그런데 놀라운 건 지금부터야. 할아버지가 마치 도인처럼 말씀하셨어.


"어차피 내 차는 고물차라. 보험료만 올라가고. 딱히 문제없으니 그냥 가쇼~"


"네?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됐으니 그냥 가쇼~"


나는 아이도 찾아야 하고 출근도 해야 했어.


'에이 씨발 몰라'


나는 그냥 왔어. 반대편으로 자동차 핸들을 꺾고 집으로 달려오는데 뺑소니로 신고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긴 했어.


다행히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찰서에서 연락 온 건 없으니 신고당하진 않았나 봐. 혹시 할아버지께서 점심반주라도 드시고 운전하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일을 한꺼번에 겪고 나니 그날 하루는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 눈이 온다는 소식에 주말여행을 취소했는데 눈 대신 비가 오고 말 것 만 같은 그런 상상도 해봤어. 그날은 사실 여러모로 중요한 날이긴 했어. 브런치 모임이 있었고, 지원해 둔 일터에서 합격여부를 알려주는 날이었거든.


예상대로야. 불합격했어.


아이가 사라졌고, 차사고를 냈고, 불합격했어. 그런데 그날 수업은 정말 잘 풀린 거야. 응원하던 사람이 컴페티션에서 우승했어. 치킨을 시키고 맥주를 마셨어. 배달기사는 친절했고 맥주는 시원했지. 닭의 익힘 정도도 딱 좋았어. 하지만 짜증이 가시진 않았어. 땅굴을 파는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어. 술기운에 잠을 청했지. 도저히 기분이 회복되질 않았어.


온라인 독서 앱을 켰어. AI가 추천해 주는 적당한 책 한권을 내려받았고 찬찬히 읽어 내려갔지. 활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어.


"괜찮아. 지난 일이야. 네가 어떻게 할 수 없어. 문제는 결국 해결되는 거야. 시간은 흘러.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니까. 잘 넘어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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