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설렁설렁 읽었는데 곱씹어 읽을수록 정말 놀라운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읽으면서 작가가 어떻게 장애에 대해 이렇게 잘 이해하는지 감탄했다. 장애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장애인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이 소설에는 청각장애, 언어장애, 시각장애를 가진 세 사람이 나온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선생은 십 대였을 때 온 가족이 독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독일 지사의 책임자로 발령받았지만 일 년만에 사직서를 내고 집을 나갔다가 실명한 채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점점 시각을 잃어가는 선생은 담담히 어둠에 적응해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는 독일에서 안과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의사의 딸을 만나게 되는데 청각장애인이었다. 그녀는 독순술을 배워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었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청각장애인을 처음 본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오해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목격한 어린 선생은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곧 가까워진다. 대화를 할 때 한 사람은 입술 모양을 읽고, 다른 한 사람은 수첩에 할 말을 적는 식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열다섯 살에 독일이라는 낯선 환경에 놓인 그와 청인들의 세상에서 사는 농인인 여자친구는 소수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가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는 걸 안과 의사인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여자는 남자를 잘 이해하지만 갓난아기였을 때 청력을 잃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남자는 잘 모른다.
자기에게 말을 거는 여자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그는 독순술 수업에서 말하는 법을 배웠다는 여자친구에게 말을 해달라고 청한다. 상대를 위해 열심히 수어를 공부하고 연습한 만큼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수어로 그런 요구를 했으면 받아들여졌거나 그녀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이든 해달라는 그의 입술 모양을 읽은 그녀는 화를 냈고 몇 주 후에 만났을 때는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그들 관계는 끝났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렸을 때 청력을 잃으면 발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기들은 부모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조율하는 방법을 저절로 배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소리를 내어 말할 수 있어도 제각각 다양한 소리를 내는데 보통 사람이 내는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나기도 한다. 의사의 딸은 언어장애 때문에 필담으로 대화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남자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그가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 목소리.
겨울 밤 창문 틈을 할퀴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 실톱이 쇠 위에서 소리치고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 당신의 목소리. (p47)
남자는 자신이 시력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래에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으려면 남자가 말할 때 여자는 그 입술을 읽으며, 여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점자로 쓸 때 남자는 손으로 읽어야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달랐기에 헤어졌고 접점을 찾기에는 간극이 너무 컸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자가 희랍어 수업에서 만난 여자는 언어장애가 있었다. 그녀는 표정으로 말하고 눈으로 인사했는데 남자는 그런 모습에서 어릴 때 만난 청각장애인 여자친구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 낯선 언어인 프랑스어를 통해 잃었던 목소리를 되찾은 경험을 되살려 언어장애를 고치려고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는 수어도 배웠으면 좋았을 것 같다. 시선이 말과 닮았다고 느끼는 여자는 청각장애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여자에게도 희랍어 선생은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한다.
한 학생이 웃으며 나에게 말했어. 그 여자가 시를 썼다고. 나는 호기심이 생겨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여자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올려다보더니 일어서서 강의실을 나가버렸어.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 건 그때였어. 여태 입술을 읽어 간신히 강의를 따라왔던 거라고. p77.
그건 오해였지만 어릴 때 만났던 여자친구보다 관계를 진전시키기엔 훨씬 나은 상황이다. 시각장애인인 그가 하는 말을 그녀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여자친구의 목소리를 갈구했다는 이유로 여자로부터 내쳐진 남자는 성인이 된 후 일시적으로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끌어낸다. 언젠가 시각을 완전히 잃을 자신에게 필요한 건 타인의 목소리였기에 결국 원한 걸 얻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는 조심스러워졌고 새로 만난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보이는 사물들이 점점 희미해져가며 시력이 약해진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겪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이 소설에 나오는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가진 인물을 잘 이해할 수 있어 책에 몰입했다. 이만큼이나 장애에 대해 잘 이해하는 작가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게 고맙고 기쁘다. 이 책을 통해 장애인의 삶을 친숙하게 느끼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걸 『희랍어 시간』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다음에 읽을 땐 또 어떤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