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상사가 자꾸 만나자고 한다

나한테 못되게 굴었어도, 당신의 성공을 빕니다

by Sean

정리해고 된 지 한 달이 되었다. 마지막 근무일에 '다다음주에 만나자'라고 얘기하고 헤어졌던 내 전 보스의 말은 진짜였나 보다. 그녀는 마지막 근무일 기준 열흘 뒤 나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했고, 대답하기 귀찮았던 나는 3일 뒤에 캐나다 밖에 놀러 와있다는 거짓말로 그녀를 피했다. 그리고 정확히 마지막 근무일 기준 한 달 뒤, 그녀는 '내 생각이 났다'며 한 번 더 만나자고 했다. 이번에는 얼굴이라도 봐야지 싶어서 그러자고 했다. 사실 둘이 만나면 어색한데. 이제는 내 상사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행인 1 정도 되는 사람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가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아, 정리해고가 된 김에 내가 왜 상사를 대하는데 자꾸 긴장하고 떨리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 나의 결론은, 권위적이었던 아빠 때문에 '상사', '선배', '선생님' 등 수직적인 관계가 생기면 그 사람을 대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다들 정리해고를 당하면 전 상사도 만나고 그러는 건가? 같은 처지여서 위로를 받고 싶은 건지, 나의 상황을 보면서 안도하고 싶은 건지, 혹은 한국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생겨서 대신 사줄 수 있냐고 부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 읽었던 책에서 내 감정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믿지 말고, '사실'만 바라보라고 했으니까 '그녀를 수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정도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나쁜 생각은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취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우겠다'라던 그녀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약 27여 년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사람을 너무 믿은 탓에 데었던 게 많았던 나는, 그런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만 괘씸하고 웃기다.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서 만나기 싫었다가, 또 나중에 인연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잘 마무리 짓자 싶어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교차해서 든다. 그래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그녀의 성공을 바라면 너무 멍청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나는 내가 착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 주변 사람들 중 몇몇은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 사실 그러는 게 내 마음이 편해서 그러는 건데,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러는 건데, 친구들은 그게 이기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나의 선택에 확신은 없지만, 이젠 상사에서 벗어나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볼 수 있지는 않을까, 또 다른 나의 친구로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겨난다. 이런 거 보면 참 멍청한 것 같다가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고 넘기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불 같았던 성격은 어느새 잠잠해지고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구직해야 하니까 머리 아프게 재지 말고 그냥 내 마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자. 어차피 매일 심심했는데 나한테도 잘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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