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새 책방 둥지의 문장들
인스타그램이 있기 전에는 싸이월드가 있었다. 그리고 싸이월드가 있기 전에는 아날로그 앨범이 있었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그 밑에 정성스레 멘트를 적는 것은 유전이다.
막 한글을 뗀 초등학교의 어느 날, 나는 엄마가 정리해 둔 하얀색 앨범을 발견했다. 왜 그 전까지는 엄마가 그 앨범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는 지 알 수 없지만 그 앨범은 내 것이었다. 동생의 것은 파랑색이고 내 것은 하얀 색.
크고 두꺼운 그 앨범은 가죽 양장으로 이국적인 가문의 문장 비스무리한 금장이 박혀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당시 사진 앨범 디자인이었지만 내 눈에 그것은 대단한 가문의 숨겨진 마법책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막 태어나 새빨간 내 얼굴부터 차례차례 꽂아진 사진과 정성스럽게 쓰여진 엄마의 기록이 있었다. 길고 멋진 문장도 아니고. 처음 걸은 날. 광주에서 이모들과. 같이 담백하고 간결한 기록. 그 순간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 같은 사진 속의 순간들이 움직여 사건처럼 기록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 뒤로 나는 종종 어리고 서툰 글씨로 엄마의 기록 밑에 몇 글자 덧붙여 적었다. 아마 그게 시작이었을 거다.
앨범 속 기록은 싸이월드로 다시 인스타그램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편집된 행복의 쇼윈도 라고 했다. 그리고 그 쇼윈도 앞에서 자신의 불행이 더 크게 느껴지거나 아니면 불행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게 하는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기록했던 나의 성장 앨범에는 행복이 편집되어 있다. 어린시절이 앨범처럼 모두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평온한 성장기를 보냈다. 물론 잘라버린 사진들과 함께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린 꺼내고 싶지 않은 불행의 흔적도 많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과 젊은 날의 나로 가득찼던 싸이월드는 망해서 사라져버렸다.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 속 사진들은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다. 인스타그램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 앨범이든 싸이월드든 인스타든 머리 속 폴더에 이미지를 저장하기 위한 편집 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록을 하는 것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일 수도 있지만 더 효율적으로 기억을 관리하고자 하는 편집 과정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한 장면을 꺼내 그 안에 사람들을 지운다. 그 날의 무드와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깔고 작은 움직임을 준다. 10년 전에는 내 머리 속에서나 가능하던 이런 기능은 이미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세상이 멸망해버린다던 2020원더 키드보다고 5년이나 더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기술이다.) 하지만 내 머리는 거기에 냄새를 더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톡 오려내 합성을 시켜준다. 그러면 또 새로운 장면이 저장된다.
기억이란 뭘까? 기록된 기억은 왜곡일까? 움직이는 사진은 가짜일까? 내가 기억이라고 믿고 있는 추억들이 사실을 꾸며낸 허상이나 상상은 아닐까?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확인하기 위해 팔을 꼬집었던 빨강머리 앤처럼 나는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팔을 살짝 꼬집어 본다. 내가 머리 속에 기록하고 있는 기억 속에 삽입되어 새로운 기록으로 편집된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안심한다. 기억이든 기록이든 그 뭐라든 사실 상관없다. 그저 매일 매일 행복을 보기 좋게 편집해 한번씩 꺼내보며 웃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