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를 지키는 일상의 알_S의 질문
사실 열 살미만의 기억은 오래된 앨범 속 사진 같다. 그래서 최애를 만난 날도 기억을 더듬거려야 한다.
우리 집보다 넓었던 큰 고모 집. 등나무 가구. 앉아서 돌리던 재봉틀과 낮은 수납장 위에 유난히 파랗게 기억되는 티브이 화면.
그리고 그 파란 화면 속에 휘날리던 천과 날아다니는 귀신을 지키기 위해 덜컹 거리는 나무 가방을 메고 어리숙하게 뛰어다니던 내 최애.
아아~아아~라고 소리를 내면서 등장하던 귀신이 내 최애를 구하기 위해서 물통 속에서 입을 맞추었을 때의 충격은 열 살 미만은 감당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이래서 시청연령제한이 있나보다)
내 최애는 장국영이다.
최민식 배우가 쿠숑이던 시절. 우리나라 드라마가 온통 중동 일꾼들과 제 몇 공화국으로 가득했던 시절. 높게 머리를 묶고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날리며 날아다니던 홍콩 배우들은 모두의 사랑이었다.
컬러풀하고 반짝거리던 화면 속 도시와 길에서는 절대 입을 수 없을 거 같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던 배우들.
사실 장국영 말고도 좋아하던 홍콩 배우도 많았다. 정우성보다 먼저 오토바이를 타고 손을 놓았던 유덕화나 안아주고 싶었던 여명이나 따오밍스 공자였던 옌청쉬까지. 그래도 역시 최애는 딱 하나 장국영이었다.
인터넷이나 OTT도 없던 시절. 장국영 영화를 보기 위해 용돈을 모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던 영화들. 선명하게 빨간 띠가 둘러져서 빌릴 수도 없던 장국영 영화를 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이 거짓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쩐지 장국영은 죽거나 불행해져야 끝이 났던 영화들(발랄한 해피엔딩도 물론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아마 장국영 SNS를 확인하거나 내한을 한다고 하면 인천 공항에서 카메라를 들고 가서 기다리는 열정을 부려볼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다.
그러니 용돈을 모아 영화 잡지를 사고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에 가서 장국영이 나온 비디오를 사모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대학생만 돼 봐라. 비행기만 탈 수 있게 되어봐라.
그날을 기다리면서 대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제일 먼저 배운 것도 중국어였다.
나는 한국에서 온 당신의 오래된 팬이라고 꼭 중국어로 말을 해야지.(배우고 나서야 광동어와 보통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리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던 4월의 첫째 날 나는 동생에게 장국영이 죽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대학교 3학년 만우절이었다.
아무리 만우절이라도 이딴 거짓말을 하면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인터넷이 되지 않는 핸드폰은 검색기능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지하철 역 석간신문 헤드라인에서 장국영 사망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내 최애가 죽었다. 화면 밖에서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최애가 가본 적 없는 홍콩에서 죽었다.
여전히 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 있을 거 같은 나의 최애를 나는 매년 만우절마다 기억한다. 다행히 아직은 인스타에도 나처럼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글이 종종 올라온다.
나는 여전히 중국 드라마를 본다. 이제는 아무도 홍콩 드라마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더 이상 홍콩이 그때의 그 반짝임이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중국 드라마에는 그 시기에 낭만이 없다. 그래도 한번씩 장국영처럼 노래를 부르고 장국영처럼 연기를 하고 장국영처럼 서럽게 우는 배우를 찾아낸다.
지독하게 예민하고 여렸던 사람. 남자를 사랑했고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
누구도 선뜻 넥스트가 되고 싶지 않은. 아니 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슬프다가도 그래서 안심한다.
세상에 딱 한 명뿐이었던 장국영. 영원한 나의 哥哥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