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처음이 좋다던 그 내 생각이 모순처럼 느껴지는 건 왜인지. 처음 그 장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지. 차라리 꿈 없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어린애가 되고 싶진 않다.
대통령이 꿈이고 과학자가 꿈이라던 그 철부지들 사이에 다시 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고 싶은 난, 그러나 다시 영화감독이 되고 싶지는 않음을.
뜻 모를 미소 뒤 감추는 게 본심이라면 지금 당장 살아남는 일이 전부일지 모르니.
"지도자 동지께서는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당신 안에는 진정 우상이 되고자 한 열망이 존재했기에 그리 된 건가. 그게 만약 누군가가 심어놓은 의도였다면 말이다.
창문이 없어 그 시선은 벽을 향하고, 그 위로 그려지는 것들을 보며.
그 위 물체들은 움직이고 세상은 그렇게 변화한다. 그 영화의 제목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난 보장 받았음을. 언제라도 사람들을 모을 힘이 손에 쥐어졌으며. 커다란 차가 와 전기를 공급할 테고, 그럼에도 체제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산업은 중단되고 말 것이다.
세상은 변하며, 큰 너울이 일어 곧 사람들이 대피할 듯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장면이 나타나 멈춘다. 엔도 료의 소설청이 세워질 계획이 드러나며.
불안이 체제를 유지한다는 한 문장을 내세우며 닻을 올린다. 곧 큰 배가 도착할 테다. 이곳이 바다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바다 될 것을 예감하듯. 개척된 항로 끝 닿고야 말 땅처럼 그곳으로 향한다.
쓸모없는 유산처럼 덩그러니 놓인 휴게소를 만나고.
그날은 평양을 벗어나 달렸는데 길은 울퉁불퉁했고 제대로 세워진 표지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있었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을 테다.
그곳에 한 대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봤다. 그 건물 안에는 심지어 음식과 음료도 판다 했다.
그날 날씨는 무척 흐렸고, 그 오래된 2층 건물은 날 쉬게 하려 했지만 그 차는 빠르게 지나칠 수밖에 없었음을.
평양으로 연결된 길들은 대부분 개발 계획이거나 개발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불 꺼진 터널을 달리다 벽에 들이받아, 그처럼 신문에도 실리지 못한 채 사라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음을.
닐 그곳에 다시 데려다 달라 말했다. 어느 날에는. 라 부장에게 한 부탁이었다.
그곳에서 음식과 음료만 맛본 뒤 돌아오리라 약속했다. 그는 날 의심쩍은 눈으로 봤지만 못내 고개 끄덕였고.
그날 이후, 그들은 내게 여자 만날 것을 권했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내게 새로운 체계를 적용하려는 듯, 내 머리를 프로그래밍하려는 것처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관찰할 듯이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같은 날 얼굴에 분을 잔뜩 바른 여자들이 한 명씩 거실에 앉아있곤 했다. 그 얼굴 생김새는 모두 달랐지만 어딘지 다 닮았다.
처음에는 새로 고용된 직원일까 궁금해했는데, 그렇게 둘만 남겨둔 채 라 부장 그리고 사람들은 자리 비운 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들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냉장고에 있던 코코아 탄산 단물을 꺼내 권하는 것뿐이었으며.
방 안으로 들어간 난 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았고. 꼭 어린 아이처럼.
난 이미 그런 모습 그런 냄새만 맡아도 어느 정도 흔들리도록 설계됐지만 다른 생각을 했다. 스스로를 그 여자들에 집중시키기에는, 그러나 그 내 시선은 그 여자들이 팔에 걸치고 온 가방 같은 것에만 향했기 때문이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사라진 한 남자의 운명을 떠올리기도 하며. 찌 숨은 지렁이를 먹이로 여겨 멍청하게도 퍼덕대다 죽는 물고기 신세이기를 난 거부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여섯 번째 여자였나?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끝내 토라져 가방 들고 일어서던 그 모습이.
다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곁에 누군가를 두지 않을 테다. 결국 돌아올 것을 알기에.
어느 날 라 부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술에는 의지하면서 여성 동지들을 곁에 둘 생각은 않는군요."
포기한 듯 고개 떨구다 이내 담배를 입에 물었고.
"영화 일은 어떻습니까?"
그 입 주위로 그윽한 연기들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라 부장은 지도자 동지의 생각을 알 수 없었을 텐데. 때론 궁금해하는 듯 물었고.
그 질문 뒤엔 시선 돌려 다른 곳을 보며 말이다. 영화는 곧 개봉될 것이다. 국제영화회관에서 비밀 시사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며.
그곳은 꼭 위험 물질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장소처럼. 양각교를 건너니 보이던 그 둥근 두 개의 건축물을 보며 난 그리 생각했다. 좁은 구멍으로 버려질 한 줄기 나쁜 물이 온 강을 오염시킬 듯. 그날 평양의 하늘은 유독 검고 시야가 흐렸는데.
"사람들이 많이 볼까요?"
라 부장에게 난 되물었다. 인민들이 과연 그 영화를 견뎌낼 수 있을지 말이다. 극장을 가득 채우고, 극장 입구마다 줄 선 그들 모습을 난 목격할 수 있을지.
흐린 날이 지나 곧 해가 뜰 거라는 기대처럼. 그러나 라 부장의 그 표정은 가망 없는 자의 것이어서 우울하게만 느껴졌음을.
언젠가 지도자 동지가 내게 한 말이었다. 전쟁을 치르려는 자의 진심은, 그래야 슬픔이 오기 때문이라며. 슬퍼야 감동하고 비극이라 느껴야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그 말을.
솟아나지 않은 저 먼 산을 보듯 그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말입니다."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총성 그리고 포탄 소리. 그들이 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을 가할 때 남쪽 사람들은 일순간 절망에 빠지리라.
단 네 명만이 참석할 수 있는 시사회였다. 감독과 제작 총책임자, 김영철 동지, 그리고.
몇 주가 지난 후였다. 곁에 앉은 그의 얼굴 그 눈을 몰래 훔쳐봤다. 지도자 동지의 눈은 안경에 가려 있었지만 그가 무얼 보는지 알 듯했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장은호는 내내 안절부절못한다. 등을 기대 있지도 못하는. 내 앞에선 보인 적 없는 모습을.
"훌륭한 영화입니다! 이곳이 인민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영화가 끝날 땐 그렇게.
마지막 장면이 지워지며 곧 글자들이 오르고, 내 시선은 그 이름들에 멈춰 있다. 고개 옆으로 돌렸을 때 지도자 동지는 내 손을 꼭 잡았으며 극장에선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심각하게 보던 그는. 어떤 시선이 느껴져 고개 돌렸을 때 김영철 동지는.
자신의 두 손을 모아 쥐는 장은호의 모습이 스치듯 보였고 곧 감격에 찬 듯 손뼉을 쳐 다시 그를. 마지막까지 그는 허수아비를 연기했다.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그리고 자라날 잊히지 않을 우리 영화를.
큰 나무들을 비추고. 철문이 붙은 가옥들은 여전히 쓸쓸한 채로 있다. 더 먼 기억의 세계로 떠난다. 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건가. 이 영화의 시작이었나. 아니, 만약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면.
그렇지만 그는 왜 그 마지막 순간을 감동적으로 여기지 않았던지. 김영철 동지, 그는 왜 홀로 낮은 시선으로 자신의 두 손을 보고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