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없는 시절을 견뎌낸 나, 이제 AI와 함께 진화하다
아이돌의 노래 대신, 영어와 중국어 단어장을 끼고 살던 학생이었다.
공부는 의무가 아니라 취미였고, 언어는 세상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처럼 느껴졌다.
그 꾸준한 호기심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외국어 두 가지를 원어민 수준으로 익힌 덕분에
나는 마침내 해외 대학에서 전임교수로서 연구와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에서 CD, MP3, 그리고 스트리밍까지—
나는 모든 오디오 세대의 변화를 통째로 겪은 세대다.
이제는 그 자리를 인공지능(AI)이 이어받았다.
불과 20년 사이, 기술은 인간의 진화 속도를 추월했다.
가끔은 두렵고, 또 가끔은 경이롭다.
20대의 나는 전화영어와 화상영어로 회화 실력을 다졌고,
30대가 된 지금은 AI 튜터와 매일 대화하며 언어 감각을 유지한다.
요즘 아이들이 AI로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편리한 세상이 되었구나’ 싶어 부럽다가도,
‘AI가 공부까지 잘해버리면, 미래의 경쟁은 더 치열해지겠구나’ 싶어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나는 AI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AI와 함께 진화하고 있는 과학자다.
AI를 활용하는 시대의 연구자는 기술의 도움을 받되,
결국 인간의 통찰로 실험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박사과정 시절, 나는 매일 새벽 실험실 문을 열었다.
피펫을 들고 시약을 섞으며, 그날의 첫 데이터를 기다렸다.
논문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수십 편의 선행연구를 뒤지고,
논문 데이터 한 장을 얻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웠다.
그때는 AI도, 자동화도 없던 시대였다.
단백체(Proteomics) 분석은 엑셀과 손계산으로,
유전체(Genomics) 정렬은 오류투성이 스크립트를 직접 고치며 했다.
실험이 아니라 인내가 연구의 자산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종종 스스로를 다독인다.
“AI 없는 시대를 견뎌낸 나, 참 대견하다.”
2022년 11월, OpenAI가 ChatGPT를 공개했다.
놀랍게도 그 시기는 내가 전임교수로 임용 제안을 받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즉, 나의 교수 인생과 AI의 상용화는 거의 동시에 시작된 셈이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새벽, 커피 한 잔과 함께 ChatGPT를 연다.
연구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논문 초록을 다듬고,
키워드만 입력하면 관련 논문이 줄줄이 펼쳐진다.
하루의 첫 대화가 AI와의 회의가 된 셈이다.
Proteomics 분석엔 AI 기반 모델 DeepLC,
유전체 데이터는 AI 파이프라인으로 자동 정제,
단백질 구조는 AlphaFold가 3D 모델로 즉시 시각화해 준다.
예전에는 “결과”였던 데이터가,
이제는 “출발점”이 되었다.
AI가 대신해 주는 일은 많다.
복잡한 통계, 데이터 시각화, 연구 트렌드 탐색.
하지만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AI는 손의 노동을 대신하지만,
눈과 마음의 통찰은 대신할 수 없다.
세포를 배양하고, 환자 조직에서 오가노이드를 구축하고,
신약 후보물질의 반응을 지켜보는 순간—
그건 오직 인간의 감각이 해내는 일이다.
wet lab 실험은 여전히 인간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세포의 미묘한 색 변화, 시약의 냄새, 실험대의 온도.
이 모든 건 AI가 인식하지 못하는 생명의 언어다.
AI는 데이터를 계산하지만,
그 결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건 인간의 철학이다.
진짜 연구란 ‘무엇을 아는가’보다,
‘무엇을 모르는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AI가 계산하지 못하는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 공백이 곧 나의 자리,
그리고 내가 지켜온 연구자의 니치(niche) 다.
요즘 젊은 층의 취업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진다. 그리고 자주 묻는다.
“AI가 우리를 대체하지 않을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AI는 도구일 뿐이다. 진짜 혁신은, 그 도구를 다루는 인간의 깊이에서 나온다.
AI는 효율을 준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일이다.
AI가 데이터를 ‘만드는 시대’라면,
우리는 그 데이터를 ‘이야기로 엮는 시대’의 창작자다.
나는 AI와 경쟁하지 않는다. AI와 협력하며,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AI 이전 시대의 끈기와, AI 시대의 속도를 함께 품은 나.
그 두 리듬이 공존하는 곳에서 나는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 연구를 이어간다.
연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결국,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교수로 자리 잡기까지,
그 과정은 불안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뜨겁게 빛났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빚어냈다.
AI 없는 시절을 버텨낸 과학자로서,
이제는 AI와 함께 진화하며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본다.
과학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여전히 배우고, 기록하고, 성장한다.
앞으로의 연재는 ‘제2의 챕터’로 이어질 것이다.
중국에서의 연구, 교육, 그리고 일상 속에서
이방인으로서 세계를 다시 배우는 과정—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의미의 ‘연결’을 써 내려갈 것이다.
연구자이자 작가로서, 나는 실험과 글, 과학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놓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리 위에서, 오늘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위한 쉼표.
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그리고 천천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