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날(2부:우정)

고독 속에서도, 따뜻한 연대가 피어나는 순간

by 박주영

미국 포닥 경력의 옆집 언니, 곡 선생

곡 선생은 나보다 네 살 많은 언니였다.
중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미국 서부에서 포닥(Postdoc)을 마친 뒤 돌아와 이곳 교수 아파트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녀는 늘 단정하고, 조용했으며, 묘하게 단단한 기운이 있었다.


첫인상 — 계단을 오르내리는 언니

우리는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며, 같은 교수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나는 처음에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어느 날부터 언니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층계를 오르며 마주칠 때면 그녀는 밝게 인사했다.
“우리,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잖아요. 잘 통할 거예요.”
그 말에 우리는 웃었다.


연구로 이어진 인연

출퇴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우리는 자주 연구 이야기를 나눴다.
곡 선생은 미국과 중국 연구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해 주며,
현지에서 신뢰할 만한 시약 회사들을 추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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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는 ‘중국산’ 연구 물품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 덕분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의 시약들은 미국 수입산의 30% 가격에, 효과는 거의 동일했다.
품질 좋은 항체, 정제 키트, 분석 기술까지—
이미 중국은 ‘과학의 자급자족’을 이루고 있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미국 명문대를 거쳐 돌아온 수많은 중국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수입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하버드, 스탠퍼드, MIT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자국의 연구 인프라를 새롭게 세워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 그리고 진짜 자립

한국 모교에서 중국 대학교로 이직 후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기존의 실험 장비도, 시약도 모두 두고 나왔다.
국제 통관 규제로 인해 한국에서 쓰던 시약은 가져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켰다.
처음부터, 오롯이 내 힘으로, 내 실험실을 구축했다.
그 과정은 고되었지만, 연구자로서의 자립심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곡 선생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조언해 주었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나도 시약을 콜드체인으로 운송했어요.
중국엔 그런 과학자들을 위한 전문 운송 회사도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중국의 과학 생태계가
얼마나 빠르게 자립해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떠남, 그리고 남은 정

2년 전, 나는 새로운 대학교로 이직하며 조용히 이사했다.
그녀에게 따로 인사하지 못했다.
그 시절, 부당한 상사의 압박과 논문 저작권 문제로 힘들었던 마음이
그저 말없이 떠나게 만들었다.

(*14화 소울메이트 편 언급)


며칠 뒤, 메시지가 왔다.

“동생이 이사 간 걸 이제야 알았어요.
조용히 떠나서 너무 서운했어요.”
그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다.
“언니, 즐겁게 떠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좋은 소식 있을 때는 꼭 연락드릴게요.”


2년 뒤, 뜻밖의 연락

얼마 전, 엄마가 내 옷을 택배로 보내셨는데
주소를 예전 교수 아파트로 적으셨다.

며칠 후, 곡 선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며칠 동안 문 앞에 택배가 있어서 봤더니, 너 앞으로 온 거더라.
내가 현주소로 다시 보내줄까?”
그녀의 사진 속, 택배는 내가 떠난 집 앞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나저나, 네가 살던 집은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왔어.
아직 그대로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삶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시간은 흘러도, 마음은 남는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을 자주 떠올린다.
아침마다 계단을 오르며 나눈 짧은 대화들,
셔틀버스 안의 연구 이야기들,
명절마다 나누던 쫑즈와 삶은 계란의 온기.

이제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지만,
그녀와의 짧은 인연은 내 마음의 한 모퉁이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의 곡 선생이 내게 알려준 건
“연대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힘”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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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우정의 결

이제 나는 혼자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고독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사람들과의 인연은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연구자로서, 여성으로서, 이방인으로서
나는 오늘도 나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 위에는,
한때 함께 계단을 오르던 옆집 언니의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미소는 마치 이방의 땅에서 피어난
작은 봄빛처럼,
내 마음의 어둠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배웠다.
한국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리움이 사라져야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그리움을 품은 채로도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의 나라를 빛낸다.
그건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믿는 삶의 태도다.


이제 나의 ‘한국’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단단한 우정과 그리움의 온기 속에서
나는 또 한 걸음, 나를 빚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