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대신, 배움을 택하다
중국의 의과대학으로 이직한 첫 해,
나는 그저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이 보장되는
‘과학 인재의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명문대에서 학사와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국내와 미국에서 포닥 생활까지 거친 뒤,
이제는 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타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후학 양성에 기여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안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
‘나는 지금 나의 산을 파먹고 사는 건 아닐까.’
타국의 시스템 속에서 내 연구력과 노하우가 천천히 소모되어 가는 듯한 기분은,
연구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도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주, 나는 중국 의과대학에서 박사 졸업논문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심사위원석 앞에는 정중하게 포장된 봉투 하나씩이 놓여 있었다.
중국에서는 박사 졸업 심사위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공식적인 심사료를 제공한다.
그 봉투를 손에 쥔 순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배움이란, 언제나 대가를 초월하는 일이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중국의 대학원 시스템은 한국보다 훨씬 가파른 현실의 벽을 마주한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를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학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눈빛 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보았다.
돌아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학부와 대학원 시절 내내 등록금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박사 과정 중에도 조교 장학금으로 세후 월 200만 원을 받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물여덟, 스스로 논문을 완성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건 단순한 ‘운’이 아니라,
배움을 향한 나의 방향이 올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움은 언제나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언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나는 다시 제로에서 배우고, 적응하고, 세운다.
그건 나의 본능이자, 과학자로서 살아 있는 증거다.
심사 당일, 나는 준비된 좌석에 앉아 조용히 학생들의 발표 자료를 훑어보았다.
두 명의 박사 후보가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20대 때 내 박사 최종 답변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거의 한 생을 걸 듯 논문을 완성했다.
실험 데이터의 수치 하나, 문장의 쉼표 하나에도 목숨을 걸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이 ‘학문’이라 믿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의 내가 꿈꾸던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리는 ‘도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연구의 한복판에 있었고,
지도교수의 조언 없이 스스로 방향을 세워야 하는
독립된 연구자로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의 연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기술과 통찰을 발판 삼아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문득 두려움이 스친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과연 맞을까?’
참고할 수 있는 건 논문뿐이고,
의논할 스승은 더 이상 곁에 없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뿐이다.
한국에서 지도교수 아래서 연구하던 시절,
나는 내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 실험을 설계하고
결과를 정리해 보고드릴 때마다,
내 제안의 10%만 받아들여졌다.
나머지 90%는 “아직 시기상조” 혹은 “그건 네가 나중에 해보라”는 말로 흩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재목이라면,
스승님과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애증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과학적인 증거를 온전히 봐주지 않는 교수님 앞에서
나는 점점 열정이 식어갔다.
“이제는 시키는 대로 잘해서 논문 내고, 빨리 독립하자.”
그게 나의 생존 전략이 되었고,
그 시절의 나는 더 이상 ‘탐구하는 학생’이 아니라
‘결과를 제출하는 노동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독립한 지금,
나는 긴 호흡으로 나의 연구 세계를 다시 세우고 있다.
과거 스승이 하던 연구를 단순히 잇지 않는다.
그때 배운 기술과 통찰은 밑거름이 되었지만,
이제는 나만의 시야로 새로운 과학적 질문을 던지는 연구자가 되었다.
실험과 데이터를 통해
나의 가설의 가치를 하나씩 증명해 나가며,
나는 점점 더 확신을 얻는다 —
이 길은 누가 정해준 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그 과정은 여전히 낯설고 고단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허락받는 연구자”가 아니다.
이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연구자다.
그 사실이 내게는 큰 자유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다.
자유는 언제나 불안과 함께 오지만,
그 불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단단해졌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wet-lab 실험 과학자로서,
국내의 프로테오믹스·지노믹스 산업체와의 협업에 만족했었다.
그 수준이 이미 세계적으로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이직한 후,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분석 환경을 경험했다.
새로 협력하게 된 산업체는 최신 플랫폼을 기반으로,
이전 세대보다 데이터 획득 속도와 감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 기술이었다.
그리고 정량 분석용 파이프라인과 알고리즘 최적화 기술을 함께 적용하면서,
나는 이전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복합 단백질 네트워크와 신호전달 경로까지
정량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처럼 업그레이드된 플랫폼을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샘플 분석 의뢰 단가가 한국의 20%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의 평균 인건비가 한국이나 미국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더 풍부한 샘플 수로, 더 정밀한 비교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치열한 산업 경쟁 환경이 더해진다.
중국의 연구 분석 시장은 벤처기업부터 상장사까지 수많은 회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젊은 영업사원들은 놀라울 만큼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
한국의 영업맨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의뢰를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연구 설계의 방향과 분석 방법까지 함께 고민한다.
박사들이 졸업 후 산업체로 진출하고,
산업체는 다시 대학과 협력하며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이 생태계 속에서,
나는 ‘과학의 발전에 진심인 나라의 현장’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의 과학 기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나는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직하고 이민하던 시절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로부터 2년 반 전,
나는 나의 연구 역량과 처우를 인정받으며 중국으로 이직했다.
그때 깨달았다,
과학계의 고급 인재에 대한 처우가 그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을 견인하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사실을.
중국은 지금, 그 인적 자원을 흡수하며
초고속으로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나라다.
이곳의 실험실과 산업체, 연구 네트워크는
이미 세계적 수준의 깊이와 속도를 갖추고 있다.
나 역시 그 성장의 한가운데서,
나의 연구를 걸고 조심스레 ‘배팅’을 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면,
지금 우리가 ‘미국으로의 이직과 이민’을 선망하던 것처럼,
머지않아 전 세계의 과학 인재들이 중국으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변화의 조짐을 나는 이미 현장에서 느끼고 있다.
그 경험은 나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남겼다.
“배움은 언제나 확장된다.”
교수가 된 지금도 여전히,
최신 논문을 탐독하고, 새로운 분석법을 익히는 일은
나의 연구를 다음 단계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스스로를 가르치는 동시에,
여전히 배우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을 때,
억울함은 사라지고,
그리움은 의미로 바뀐다.
생각의 틀을 깨고 나니, 억울함은 사라졌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은 희미해졌다.
그리움이 줄어든 건 무심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삶 속에서도 지식이 확장되는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스승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배우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자리에서 다시 성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그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