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한국에서의 추억여행
한국 직장 현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중국 직장 현실: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일을 한다.”
중국으로 이직한 지 2년 6개월. 두 나라에서 대학교 교직생활을 경험하며 관찰해 온 특징을 이렇게 한 줄로 축약할 수 있다.
추석 황금연휴를 맞아 나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워커홀릭인 내가 휴가지를 다른 여행지가 아닌 고국, 집으로 택한 이유는 아마도 “백세시대 –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은 건물이자 장소(house)이기도 하지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단(home)이기도 하다. 집은 추억이자 안식처다.
나는 태어나 세 살까지 주택에서 살았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은 없지만 부모님이 보여주신 사진과 이야기 속에서만 그 시절을 만난다. 그 후 부모님의 첫 자가 아파트로 이사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자라면서 키를 벽에 표시하던 흔적들, 입시 공부와 취미, 학교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분주한 기억들이 그 작은 집에 다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집을 옮기던 날, 나는 울었다. 감성적인 소녀였던 나는 옛집을 그리워했다. 그 시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평수도, 집값도 아니었다.
대학교에 올라와 하숙집으로 독립했을 때도 <응답하라 1994>의 창천동 하숙집이 겹쳐 떠올랐다. 2010년대 신촌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장학금으로 등록금과 하숙비를 해결했고, 과외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28살, 연세대 의대에서 의과학 박사를 마치고 연세의료원 교직원이 되었다. 하숙집에서 월세 오피스텔로 이사하며 한층 더 치열한 청춘을 보냈다. 논문을 쓰고, 개제하고, 건강이 무너지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32살에 지금의 전셋집으로 이사 왔다. 학교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내 삶의 균형이 깃든 집이다. 경의선 숲길을 따라 퇴근길 산책을 할 수 있다는 행복은, 세계 어느 도시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 대학교에 임용된 후에도 서울의 이 집은 그대로 유지했다. 벽에 붙여둔 시험 준비 전략, 다이어리, 목표가 적힌 메모지가 그대로 있다. 특정 장소에 서면, 그 시절의 내가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2022년, 연구성과를 쌓았음에도 승진할 공간이 없다는 현실에 무기력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구입했던 책이 ‘무기력 극복’ 관련 서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빠른 행동을 취했다. 재직 중이던 대학교에 티 내지 않고, 국내외 명문대학 10곳에 한국어·영어·중국어로 전임교수 임용 원서를 냈다.
9월 한 달 집중적으로 지원서를 보내고, 10월부터 면접 연락이 왔다. 11월 최종 합격. 2023년 3월 퇴사 전날까지 연구에 몰두했고, 거의 4개월 동안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했다. 탈출구가 있고, 상승할 공간이 확보된 덕분에 야근도 행복했다.
2023년 봄, 나는 중국으로 이직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올 확신은 잃지 않았다. 나에게는 독립적인 연구 책임자로서 성장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년 6개월의 중국 생활 동안, 긴 연휴 때마다 한국의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나를 위로했다. 집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였다. 서울 집에 붙여둔 목표 메모를 하나씩 이뤄낸 나를 발견했다.
이번 추석도 마찬가지다. 모교의 스승님과 연구팀, 박사 동기와 만나 근황을 나눴다. 자기 관리에 진심인 동네 주민과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신촌의 터줏대감 <홍익문고>를 찾아 추억여행을 하고 책을 구입했다. 과거의 내가 남겨둔 적립금과 정부가 지급한 민생쿠폰으로 미래의 나에게 책 선물을 했다.
대한민국은 지성과 인재가 넘쳐난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청년과 중장년 모두 취업과 생존이 큰 이슈다. 한국에 돌아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나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고민의 결이 비슷하고, 한국인은 자기 객관화가 명확하다.
한국 직장 현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중국 직장 현실: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일을 한다.”
한국은 인재가 넘쳐나지만 안정적 직장이 제한적이다. 박사 졸업 후에도 비전임교원, 계약직 연구원으로 남는 30~40대가 많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해고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한국인은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
중국도 취업 경쟁은 치열하다. 다만 학위가 자격증처럼 쓰이고, ‘꽌시’로 정규직을 얻는 경우가 많아 월급루팡이 생기기도 한다. 고용 안정성은 있지만 책임은 타인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구조는 불편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국 과학계는 계급이 명확하지만, 성과가 탁월한 개인에게 인센티브가 높다. 학술상, 인센티브가 본봉보다 몇 배 많다. 나는 해외 고급인재로 연구비 지원, 학술상과 인센티브를 받으며 도파민을 얻는다. 정년이 보장된 자리지만, 꼭 여기서 뼈를 묻을 생각은 없다.
인간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고국이 나를 필요로 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어릴 적 나는 평생 이사를 이렇게 많이 하게 될 줄 몰랐다. 백세시대의 현대인으로서 나도 중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다.
30대 인생의 변환점을 보내온 나의 첫 서울 전셋집에서, 이번 추석 글을 남긴다. 어쩌면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추석 황금연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길고, 나는 아직 젊다.
33살 목표 리스트에 적어둔 소망처럼, 마흔 즈음 전임교수로 다시 모국의 부름을 받고 금의환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날까지 나는 경계 위에서 살아가며, 나를 단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