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그냥 좋은 사람이 될게요. 그렇게 살게요.
일주일 전 화요일, 직장 상사의 배려로 조금 서둘러 근처 유방외과 진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CD와 주요한 결과지, 그리고 암표지자 검사가 있는 혈액검사 페이지를 인쇄해 가서 제출했다.
착찹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게 뭐든 어서 결론이 난다면 그 이후의 계획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혹이 있네요?"
사진을 보던 의사선생님이 이야기를 했다.
"네."
나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이쪽에 calcification이 있는 것은 걱정을 안해도 되긴 하는데, 여기.. 이부분이 이상하긴 하네요"
의사선생님은 내가 봤던 CD의 영상 한 컷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여기, 여기가 모양이 좀 이상해서요. 우선 검사를 한 번 더 해보고 할 수 있다면 오늘 바로 조직검사를 해야겠어요"
나는 기다렸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담담하게 "네"라고 대답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검사실에 누웠다. 눈앞에 보이는 초음파 영상을 의사선생님과 함께 빤히 쳐다봤다.
선생님도 심각한 표정으로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체크를 했다.
비슷한 장면이 계속 반복되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좀 흘렀을까. 갑자기 의사선생님이 무언가를 찾듯 촉진을 하면서 초음파를 보기 시작했다.
"가만있어봐, 이렇게 하면 흠. 근데 이렇게 하면. 음."
그리고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한 끄덕임을 남긴 채 옷을 갈아입고 오면 다시 설명을 해 주겠다고 했다.
진료실로 다시 들어간 나에게 선생님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것 처럼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초음파를 다시 봤는데요. 우리 가슴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죠?"
갑작스런 해부학 질문에 어버버 거리면서 대답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밑에 뭐가 있냐구요"
글쎄, 나 이렇게 몰라도 되나 아무리 말해도 학교에서 배운것은 생각도 안나고 상식선에서도 생각이 안난다. 수수께끼를 하려는 건 아니신것 같긴해서 멀뚱거리면서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모양이 이상해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혹이 없어요. 이런걸 우리는 grand defect이라고 해요. 그 부위에 아래 무언가가 없는 개인적인 특성이고 혹이라고 볼 수는 없겠네요."
그러니까 (숙련된 의사가 한 초음파로 찾아낼 수 있었던) 내가 가지고 있는 해부학적 특성이었다고 했다.
너무 감사했다.
의사선생님 한마디에 단 몇분만에 손바닥 뒤집듯 내 미래도 바뀌어 버렸다.
이런걸 감격이라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알수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쁨이라기보다는 환희에 가까웠고, 이제 마음을 편히 먹고 출국준비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치만 6개월 뒤 한번 더 추적관찰을 해야 한다는 소릴 듣긴 했고, 한편으로는 다른 선생님께 보지 않아도 될까 하는 약간의 불안함도 치고 올라왔다가, 검진을 받았던 병원에서 제대로 확인을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나기도 하면서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서 세탁기안에 뒤섞인 빨래들처럼 뭉쳐돌아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검진을 잘한거다. 앞으로 모르고 살 뻔한 일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결국엔 깨끗히 세탁된 세탁물 처럼 개운한 감정이 찾아왔고, 그 자리에는 한달 뒤 출국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후로는 정말 정신없이 출국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살 임시숙소를 예약을 하고, 살고 있는 전셋집 정리와 물건빼기를 계속 해서 했다. 그리고 출국 전까지 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살기위해 구한 임시숙소로 오늘 이사를 왔다.
방 두개에 화장실까지 넉넉히 있고, 물건이 다 빠지니 천장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고 애정이 가득했던 전셋집에서 1.5평 남짓의 고시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많은 짐을 줄이고 줄여 캐리어 단 두개에 나눠 싣고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좁은 고시원 안에 물건이 가득차 숨막히게 짓누른다.
손을 뻗을 때 마다 양 벽에 손이 닫고 몸을 돌릴 때 마다 여기저기 가구에 부딪치는 이 방안에서 단 일분도 못 있을 것 같았는데, 인터넷이 연결이 되고 시야를 눈 앞에 있는 컴퓨터와 아이패드에만 두니 이 작은 공간도 나의 세계가 된다.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고 세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견디다 보니 금방 적응해 또 이만하면 보름은 살만하겠다고 합리화를 한다. 비록 아랫집은 퇴폐 마사지 업소 같고, 남녀 구분이 따로 되어 있지 않아 옆방 앞방 모두 담배피는 아저씨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직장이랑 이전보다 훠얼씬 가까워졌음에 위안을 얻었다.
그냥 지난번 일을 겪고 나서 부터 내가 너무 궁상맞게 살아서 이런 일들이 오나 싶기도 했다. 돈 몇푼 아끼겠다고 몸을 나르고 고생을 하고. 용역 아저씨들이 도와주러오신대도 굳이굳이 침대틀을 다 헤쳐놓고 매트리스도 따로 떼어놓고. 엄마는 그런 나에게 '제발 고생하면서 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근데요 엄마. 난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살아야 마음이 편해요. 아직은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좋은일이 있으면 늘 나쁜일이 있을 것 같고요. 가끔 내가 한 모든 것들이 다 업보로 돌아올 것만 같아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 보다 몸부터 먼저 움직이는 저 자신이 너무 싫기도 해요. 오늘도 좀 싼 김밥이나 먹겠다며 여기저기로 걸어다니고, 몇 안되는 물건들 당근하겠다고 거래자들 찾아다니면서 돌아다니는데, 그럴 때 마다 스스로가 너무 지겨워요. 제 자신에게 너무 지겹고 지쳐요. 안그러고 싶은데 어느새 몸이 향하고 있는 저 스스로가 저도 가끔은 너무 싫어요. 근데요, 그냥 몰라서 그러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모를때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서 그래요.
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진 운명과 미래가 나중엔 어떻게 될 지 여전히 불안해요. 그래도. 그냥 좋은사람으로 살래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렇게 살게요. 다른건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끝까지 응원만 해 주세요. 이런 제가 싫어 스스로 지쳐 미워지지 않도록 응원을 부탁해요. 그거면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