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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Mar 21. 2025

바람이 지나간 자리

바람이 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커튼을 가볍게 흔들고,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를 미세하게 들썩이게 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마치 너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나는 순간 멈춰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 너에게서 났던 익숙한 향이 공기 속에 섞여 있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향기는 이미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너는 언제나 바람 같았다.

가까이 있는 듯하다가도 금방 멀어지고,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붙잡으려 했고,

그 끝이 이런 고요한 상실일 거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기억이란 건 참 묘하다.

잊고 싶다고 쉽게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붙잡고 싶다고 오래 남아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흐려질 거라 믿었지만,

어떤 기억은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네가 떠난 자리,

그 공백이 나를 잠식해 올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덜 사랑했더라면,

아니, 조금 덜 아파했더라면

지금쯤 우린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었을까.


창밖으로 나뭇잎이 흔들린다.

저 나뭇잎도 언젠가 가지를 떠나 바람에 흩어지겠지.

그럼에도 나무는 다시 잎을 틔우고,

언젠가는 또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겠지.


나는 아직 그럴 용기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이 자리에 서서,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본다.

너의 향기가 묻어 있을 것만 같은,

너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이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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