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아이가 군대에 갔다. 경남 진주에 있는 공군 기본군사훈련단으로 입소했는데, 부대는 예상보다 쾌적하고 넓었으며, 마치 캠퍼스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한참 동안 차량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 끝에 입영식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공군병 866기 기본군사훈련 입영식"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글자를 바라보는 순간 실감이 났다. 아들이 이제 정말 군대에 왔구나...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입소식에서 아들이 부모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장면이 있었다. 평소 시크한 태도를 보이던 아이였는데, 그 절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고, 아내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부모로서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나는 천여 명의 청년들 속에서 작은 한 점이 되어 묻혀 있는 아들을,
숙소로 행진하며 점점 멀어지는 아들을,
눈물에 가려 더욱 희미해진 녀석의 잔영을 쫓다가 그만 텅 빈 연병장의 모래알에 눈을 떨궜다.
아들을 군대로 떠나보내니 내 군 생활이 떠오른다.
나의 군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대학 시절,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하 운동 조직인 사노맹에 속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이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군대 영장이 나왔을 때 기피하며 도망 다녔다. 하지만 부모님의 깊은 한숨과 말단 공무원이었던 형님의 고충 앞에서 결국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군입대를 결정하자 조직에서 엄청난 압력이 들어왔다. 조직과 동지들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강한 의심과 압박 속에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갈등을 겪으며 입대했다. 그렇게 시작된 훈련병 생활은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 속에서 이어졌고, 결국 헬기 레펠 과정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헬기 레펠을 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고열과 어지러움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훈련을 담당했던 조교는 이를 꾀병으로 치부하며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런 상태에서 헬기 레펠을 시도하게 되었고, 밧줄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더욱이 조교는 원래 안전장치로 밧줄을 잡아줘야 했지만, 그 순간 해찰을 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는 빠른 속도로 추락했고, 외상은 없었지만 큰 충격을 입었다.
사고 후 의무대로 옮겨져 진료를 받았지만, 군의관은 나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꾀병이라고 단정 짓는 듯했다. 빨간 약과 까만 약 몇 알만을 주며 별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선임들은 나를 꾀병이나 피우며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고 몰아붙였고, 아픈 몸을 이끌고 동기들보다 몇 배나 더 혹독한 구타와 얼차려를 견뎌야 했다.
그러다 결국 수도통합병원과 광주통합병원을 거쳐, 국군통합병원에서 있을 수 있는 최대 기한을 채우고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
아들을 낳아 기르면서 생각했다.
"이 아이가 커서 군대에 갈 즈음엔 모병제 같은 제도가 도입되어, 나처럼 군대에 끌려가다시피 하는 일은 없겠지."
그런 희망과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내가 군에 가던 시절이나 35년이 흐른 지금이나, 복무 기간이 단축된 것 말고는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들이 훈련소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훈련병 생활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내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말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불안함이 밀려온다.
그저 우리 아들이 건강하게, 다치지 않고 씩씩하게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들은 나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내가 견뎌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이 아이에게는 강인함을 길러주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 경험이 삶을 단단하게 만들고, 더욱 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아비가 채우지 못한 병장 만기 전역의 기쁨을, 이병으로 제대한 이 아비와 함께 누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