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뇌는 '2배속' 버튼을 누른다

회피형 인간

by 김성수

인간의 기억력은 얼마나 정확할까?


간혹, 똑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있다. 특히, 나에게 유독 좋지 않았거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마치 편집된 필름처럼 통째로 희미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나의 긍정적인 성격 덕분이라고, 나쁜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는 축복받은 뇌를 가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그것은 내가, 전형적인 '회피형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그랬다.

감당하기 힘든 불편한 상황과 마주하면, 나는 그 자리에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영혼은 잠시 그 공간을 탈출하고, 껍데기뿐인 육신만이 그 시간을 버텨낸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든 끝나고 나면, 나의 뇌는 방금 겪었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의 일부를 스스로 삭제하거나, 흐릿하게 뭉개버린다.


마치, 지루한 영화를 보다가 흥미 없는 부분을 2배속으로 돌려버리거나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내 인생의 수많은 아픈 장면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건너뛰어 왔다.


참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는.

불편한 상황에서는 '회피'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 이 많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두려움' 이 많다.

나는 어찌 이리도 결핍이 많은 인간일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뇌가 '2배속' 버튼을 누르는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연약한 내 마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나만의 서툰 '생존 방식'이었음을.


그렇게, 나는 나의 가장 큰 약점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연민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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