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을 땐 동네 산책
일상이라는 링 위에서 정신없이 잽을 주고받다 보면, 문득 마음이 KO 직전까지 몰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만의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바로 '걷기'다. 처방전도 필요 없다. 그냥 집을 나서 동네 한 바퀴 휙 돌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엉킨 실타래 같던 마음이 스르륵 풀린다. 신기하게도, 이 마법의 걷기는 내 발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며, 나의 '동네'는 점점 더 넓고 깊어졌다.
나의 최애 산책 코스 1번 타자는 단연코 덕수궁 돌담길이다. 왜 좋냐고 묻는다면, 그냥 좋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묵직한 돌담을 옆에 끼고 뚜벅뚜벅, 리듬에 맞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속 묵은 때가 씻겨나가는 기분이랄까. 이때의 포인트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 생각의 스위치를 잠시 꺼두고 오롯이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은 텅 비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이토록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나의 열렬한 애정을 익히 알고 있는 한 지인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아마, 너는 전생에 덕수궁 무수리가 아니었을까?"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어쩌면 돌담길을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정화의 느낌은, 먼 옛날 나의 일터였던 그곳을 향한 무의식적인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내 발길을 사로잡는 곳은 서촌이다. 북촌과는 또 다른, 옛 서울의 정취가 골목골목마다 배어 나오는 그 느낌이 참 좋다. 북적이는 관광지가 아닌,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여유로움. 느릿느릿 두리번거리며 동네의 숨결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서촌 산책의 백미다. 특히, 정겨운 통인시장을 지나 고즈넉한 옛 가옥들이 늘어선 골목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서촌 산책의 화룡점정은 바로 박노수 미술관 방문!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옛 양옥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언제 찾아도 나를 설레게 한다.
세 번째 단골 산책 지는 이화벽화마을. 알록달록한 벽화 덕분에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주택들이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풍긴다. 마치 살아있는 건축 박물관 같달까. 시간을 조금 더 내어 인근 창신동 골목까지 섭렵하면, 옛 정취에 흠뻑 취하는 완벽한 시간 여행이 완성된다.
네 번째로 소개할 곳은 특유의 '힙함'과 '여유'가 공존하는 연희동이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옛 부잣집들이 자아내는 한적함과 고급스러움은 연희동만의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낸다. 골목마다 숨어있는 오랜 맛집들은 미식가를 유혹하고, 개성 넘치는 개인 카페들은 커피 애호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동네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특별한 산책을 원할 때 찾는 곳은 안양예술공원이다. 이름처럼 공원 곳곳에 설치된 예술 조형물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공원 초입의 김중업 건축 박물관에서 잠시 예술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안양예술공원의 진짜 매력은 과거와 현재의 묘한 공존에 있다. 80년대 유원지의 정겨운 감성과 세련된 현대 카페의 감각적인 분위기가 어색함 없이 뒤섞여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특히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는 마치 일본의 소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고,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가을에는 그 깊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만다.
사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보석 같은 골목길들도 수두룩하다.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 아기자기한 익선동, 소박한 성북동, 젊음의 열기가 넘치는 홍대와 연남동까지. 저마다 다른 색깔과 이야기를 품은 골목길들은 걸을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처방전은 없는 것 같다. 두 발로 써 내려가는 동네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다시 한번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그러니 혹시 지금 마음이 힘들다면, 일단 한번 걸어보시라. 당신의 발길이 닿는 곳에, 당신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