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추억
지금은 늠름한 대학생이 된 아들이 있다. 문득 18년 전, 아들이 여섯 살 꼬맹이였던 시절의 빛바랜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그 당시 아들의 세상은 온통 '번개맨' 하나뿐이었다. 눈을 뜨면 번개맨 옷을 찾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번개맨 잠옷을 입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그에게 번개맨은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루는 한 살 어린 사촌 여동생과 더 어린 사촌 남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옹기종기 모여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 사이에서, 다섯 살 사촌 여동생이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오빠, 우리 엄마, 아빠 놀이하자."
그 순간 아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가장'이 되어야 하는 현실과 '번개맨'으로서의 사명 사이에서 깊은 고뇌에 빠진 듯했다. 팽팽한 침묵 끝에, 아들은 마침내 장엄한 결단을 내렸다.
"… 좋아. 그럼 엄마, 아빠 놀이 하자."
그렇게 아들은 '아빠'가 되었고, 여동생은 '엄마',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은 '아기' 역할을 맡았다. 세상 평화로운 소꿉놀이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아내가 된 조카가 살뜰하게 남편을 챙기며 말했다.
"여보! 우리 아기 데리고 홈플러스 가요~!"
"그래요, 갑시다!"
장난감 유모차를 끌고 현관으로 향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여보, 큰일 났어요!"
"네? 무슨 일인데요, 여보?"
"지금 나쁜 악당들이 우리 동네에 쳐들어왔어요! 내가 출동해야만 해요!"
보통의 아내라면 마트 세일 시간을 운운하며 등짝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섯 살의 현명한 아내는 남편의 사명을 존중했다.
"어머! 그럼 어서 가서 나쁜 악당들을 무찔러 주세요, 여보!"
아내는 남편을 응원했고, 가장은 그 격려에 힘입어 힘차게 외쳤다.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번개 파워!"
그날, 한 가족의 단란한 홈플러스 쇼핑 계획은 가장의 긴급 출동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가정과 지구의 평화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던, 여섯 살 가장의 어깨는 그렇게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