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던 삶,
1981년,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때다.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연일 TV 뉴스에서는 영국 왕세자의 결혼식을 특집으로 다뤘다. 어린 마음에도 유독 강렬하게 각인된 것을 보면, 실로 전 세계가 주목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동화 속 공주처럼 아름다웠던 다이애나는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영화에서나 보던 마차에 올라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자와 공주의 해피엔딩이 현실로 재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동화는 동화일 뿐이었다. 그 찬란한 결혼식 이면에 감춰진 진실이 훗날 거대한 스캔들로 회자될 거라는 걸,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행복의 주인공이 된 다이애나 비의 앞날이 영원히 찬란할 줄로만 알았다.
스무 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귀족 영애의 삶은 곧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찰스 왕세자는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왕세자비로서 ‘적합하다’는 이유로 결혼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있었다. 훗날 ‘불륜녀’로 불린 카밀라가, 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예상 가능한 결혼 생활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으려 했다.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왕실의 어머니상’을 보여주었다. 유모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던 왕실 관례를 깨고, 자녀를 직접 돌보는 모습을 보였던 그녀는 당차고도 용감한 엄마였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진짜 강인함을 보았다. 어리고 여렸지만, 분명한 신념을 지닌 어머니였다.
사적인 생각이지만, 찰스 왕세자의 감정적 결핍은 유모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반면, 윌리엄 왕세자가 보여주는 부드럽고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은 다이애나의 가장 빛나는 유산이다. 예를 들어, 윌리엄은 다이애나가 설립에 기여한 자선 재단을 이어가며 정신 건강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따뜻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다이애나 비의 삶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우연이었다. 짧고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 숏츠를 보다 문득, 현실에 진짜 그런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른이 된 지금의 시선으로 그녀의 생을 다시 들여다보니, 다이애나는 단순한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한 명의 인간이었다.
왕궁이라는 이름의 감옥, 냉담하고 보수적인 왕실의 시선, 그리고 가장 가까워야 할 남편과의 불화. 세상은 그녀의 외도를 두고 손가락질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방종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혼을 선택했다. 나는 그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위한 가장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살지 못했다. 1997년, 충격적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나에게 그 소식은 어릴 적의 결혼식만큼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는 누군가를 파멸시켜 승리를 쟁취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을 뒤흔든 영웅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평범한 진심과 꺾이지 않는 마음이 지금도 오래도록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다.
현재의 찰스 국왕과 카밀라 왕비는 왕실의 중심에 서 있다. 카밀라는 때로 다이애나가 즐겨 착용했던 스타일의 의상이나 보석을 선택해 공식 석상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2023년 자선 행사에서 다이애나가 애용했던 사파이어 목걸이와 유사한 보석을 착용한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또한 다이애나가 주도했던 자선 활동의 이미지를 계승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노력은 때로 진정성보다는 의도된 연출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이애나는 이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두 아들은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간다. 윌리엄은 자선 활동을 통해, 해리는 다이애나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소외된 이들을 돕는다. 이들은 다이애나가 꿈꾼 따뜻한 왕실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승리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꺾인 것처럼 보여도, 끝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 그런 이는 죽어서도 기억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이를 의식하며 흉내 내는 모습. 바로 그것이 다이애나가 남긴, 가장 완벽한 승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