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래를 그리고 싶었던 도화지
도화지, 그림을 그리는 도구 이자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을 제재 없이 펼칠 수 있는 그런 공간.
나는 내 남자친구가 나만의 도화지가 되길 바랐을지도
내가 그리고 싶은 미래
내가 꿈꾸는 나의 회사
내가 바라는 나의 희망
속상한 마음들
안 좋은 일들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던 그 모든 나날을
그의 도화지에 쏟아내곤
다시 지우고
새로 그리고
다시 또 부어대듯 그려댓나보다.
이제
도화지가 아프단다.
내가 자꾸만 쓰고 지우고 힘들게 해서
도화지가 이젠 내 손길이 싫단다
자꾸만 그려대는 나의 구린 미래가 싫단다.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랠 왜 그리냐 했다.
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바라느냐 했다
그냥 지금 속한 곳을 떠나서 새롭게 그리라 했다.
떠나란다...
그게 널 위한 길이라고
도화지가 많이 아팠나 보다
내가 자꾸만 그려대서
더 나아진 실력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데
자꾸만 썼다 지웠다 하니 힘들었나 보다
도화지를 놔줘야겠다.
도화지를 대체할 수 있는 도구들은 있을 텐데
과연 또 이런 나의 응어리진 마음을 받아줄 리
있을까
도화지를 버리고 온 오늘..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엉엉 울었다.
수유역 언저리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내 손등에 살포시
작은 포켓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눈물이 내려오는데 마땅히 닦을 수가 없었다
도화지는 가끔 자신의 몸을 적셔가며 내 눈물을
훔쳐주곤 했는데 지금은 없어서..
누군진 모르지만 고마웠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서늘한 가을밤
내 쓰라린 마음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또 이렇게 시간은 흐르겠지...
내 마음과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