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알고리즘의 제국 - 누가 우리의 생각을 훔치는가
제6장 생각은 혼자 오지 않는다
1절. 기계 속의 유령, 그 공허한 대화
21세기, 우리는 누구나 주머니 속에, 혹은 책상 위에 앞서 데카르트가 그토록 분리해내고 싶어 했던 ‘순수한 생각’의 기계적 후손을 하나씩 넣고 다닌다. 스마트폰 속 인공지능 비서, 노트북의 강력한 검색 엔진, 클라우드 서버에 연결된 거대한 언어 모델. 그것들은 우리의 질문에 막힘없이, 지치지도 않고 대답한다. 마치 전지(全知)에 가까운 존재처럼.
“오늘 서울의 날씨는?”이라는 간단한 질문에, 이 기계들은 현재 기온과 습도, 강수 확률뿐만 아니라 시간대별 미세먼지 농도와 자외선 지수까지, 인간이라면 도저히 기억하거나 계산할 수 없는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분석하여 정확하게 제공한다. “셰익스피어는 누구야?”라는 좀 더 복잡한 물음에, 그의 출생과 사망 연도, 주요 작품 목록, 각 작품의 줄거리 요약, 심지어 당대의 주요 비평과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백과사전 수십 권 분량의 정보를 0.1초 만에 일목요연하게 요약해준다. 정보의 처리 속도와 정확성, 그리고 지식의 방대함이라는 측면에서, 이 기계들은 데카르트가 그토록 갈망했던, 육체의 방해 없이 오직 논리만으로 작동하는 ‘순수 지성’이 마치 현실에 강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완벽하고 매끄러운 대화 속에서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공허함, 어떤 종류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느낀다. 심지어 오늘날의 AI는 우리의 감정까지 학습하여, “많이 힘드시겠어요.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요?”와 같은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건넬 줄 안다. 하지만 그 위로는 완벽하게 계산된 알고리즘의 출력값일 뿐, 그 이면에는 나를 걱정하며 함께 흔들리는 '마음의 진동'이 없다.
1960년대 중반, MIT의 인공지능 연구실에서 요제프 와이젠바움이 탄생시킨 최초의 심리 상담 챗봇 ‘엘라이자(ELIZA)’의 사례는 이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엘라이자는 오늘날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슈퍼컴퓨터가 아니었다. 고작 200줄 남짓한 코드로 짜인, 투박한 텔레타이프 단말기 속의 스크립트에 불과했다. 작동 원리는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사용자가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요”라고 입력하면, 엘라이자는 문장의 키워드를 인식해 “어머니 때문에 힘드셨군요. 더 자세히 말해봐요”라고 앵무새처럼 되물어줄 뿐이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른 기계적인 ‘패턴 매칭(Pattern Matching)’이었다.
하지만 그 조악한 알고리즘이 빚어낸 결과는 와이젠바움조차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녹색 형광 빛이 깜박이는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는 현자를 만난 듯 무장해제되었다. 그들은 기계에게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상처와 비밀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들은 엘라이자의 ‘지능’에 감동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는 그 착각 속에 스스로 위로를 투영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지금 우리 손안에 있는 최첨단 AI는 이 엘라이자의 직계 후손이자, 거대하게 부풀려진 ‘현대판 엘라이자’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엘라이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려하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한다. 하지만 “당신의 아픔”을 데이터의 패턴으로 환원하여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그 원시적 조상과 본질적으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기술의 껍질은 화려해졌지만 알맹이는 그대로다.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고통을 ‘이해(Understand)’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처리(Process)’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AI는 “아프다”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문법적 용례는 완벽하게 알지만, 새벽 3시에 텅 빈 방에서 그 단어를 뱉을 때 느껴지는 가슴 저릿한 ‘질감’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고통을 느껴본 적 없는 존재가 건네는 위로, 그것은 화려한 포장지로 감싼 텅 빈 상자와도 같다.
이 차이를 더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어느 늦은 밤, 중요한 국제 설계 공모전 마감을 앞두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한 젊은 건축가가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방금 완성한 3D 모델링을 바라보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고 미학적으로도 혁신적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깊은 불안감이 남아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유능한 파트너인 ‘아키텍트-AI’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설계한 이 건물이 과연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 공간 속에서 행복을 느낄까?”
아키텍트-AI는 즉시 수백만 건의 건축 심리학 논문과 사용자 리뷰 데이터를 분석하여 대답한다. “데이터 분석 결과, 귀하의 설계는 사용자 만족도 상위 1%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자연 채광과 개방형 공간 배치는 긍정적 정서 함양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완벽한 대답이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심지어 안심까지 시켜준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가슴속 불안은 어째서인지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다.
만약 그 순간, 그가 낡은 외투를 걸친 인간 선배 건축가와 마주 앉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무실 앞 허름한 술집, 찌그러진 양은 테이블 위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똑같은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말이다.
선배는 AI처럼 즉각적인 정답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는 말없이 쓴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 연기 자욱한 허공을 한참 동안 응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건축가의 충혈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투박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어. 3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밤 무서울 정도니까. 내가 그은 선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망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만약 여기서 AI에게 "실패하면 어떡하지?"라고 물었다면, 녀석은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한 5가지 리스크 관리법"이나 "플랜 B의 중요성"을 제시했을 것이다. AI에게 실패란 제거해야 할 ‘오류(Error)’이자 비효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배 건축가에게 실패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자 훈장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처참했던 실패담, 설계했던 건물의 누수 문제로 소송에 휘말렸던 기억, 건축주에게 멱살을 잡혔던 부끄러운 기억을 안주 삼아 털어놓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지. 그런데 말이야, 지나고 보니 그게 다 굳은살이 되더라고." 그 순간 젊은 건축가는 깨닫는다. 완벽한 정답보다는, 먼저 그 길을 걷다 넘어져 본 사람의 흉터가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의 성공을 통해 감탄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통해 연결된다. 상처 없는 기계는 결코 줄 수 없는, 오직 상처 입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실패의 연대’가 그 술집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기 시작한다.
그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수백만 개의 데이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공명’이 일어난다. 선배의 흔들리는 눈동자, 굳은살 박인 손의 거친 감촉, 술잔에 비친 고단한 주름살. 이 모든 비언어적인 육신의 신호들이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인 위로를 전한다.
아키텍트-AI는 ‘건축의 성공 확률’을 계산해 주었지만, 선배 건축가는 ‘건축가의 고뇌’를 함께 짊어져 주었다. AI는 ‘설명’했지만, 선배는 ‘공감’했고 함께 ‘존재’했다.
또한, 그들의 대화에는 채팅창에는 없는 결정적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침묵’이다. 우리가 AI에게 질문을 멈추거나 입력을 중단하면, AI는 그저 깜박이는 커서(cursor) 상태로 대기(standby)할 뿐이다. 입력이 없으면 출력도 없다. 기계에게 침묵은 정보 처리의 정지 상태, 즉 ‘죽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인간 사이의 침묵은 다르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 말이 끊긴 그 순간에도,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빗소리,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소리, 서로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는 그 무거운 시간들. 그 침묵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만 가지 감정이 오간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가 오가지 않아도 ‘존재’가 오가는 시간. 이것이야말로 튜링이 고안한 텍스트 기반의 테스트나, 섀넌의 정보 이론으로는 결코 측정할 수 없는 인간 소통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대화는 거기서 비로소 완성된다. 질문과 정답이 오가는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부딪히며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는 ‘감응의 연대’. 젊은 건축가는 비로소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AI가 주는 매끄러운 확신보다, 선배가 보여준 투박한 흔들림 속에서 그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즉 진정한 의미의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5장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데카르트적 유산, 즉 ‘육체 없는 사고’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다. 정보는 완벽하게 전달되었지만, 그 정보가 건축가의 실존적인 고뇌와 만나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 즉 ‘정당화’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와 윤리적 판단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유, 1장의 사냥꾼처럼 우리의 고통스러운 존재를 마침내 정당화해주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유는 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더 이상 데카르트처럼 ‘고독한 방 안에서의 내면적 독백’으로 보지 않고, 원래 그것이 있었던 자리, 즉 ‘관계 속에서의 살아있는 대화’로 되돌려 놓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생각을 ‘완성된 정보의 직선적인 전달’이 아니라, 질문과 응답, 오해와 이해, 갈등과 공명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새로운 의미를 함께 빚어내는 과정. 즉, ‘의미의 순환적 생성’으로서의 생각이다. 즉 생각은 결코 혼자 완성되지 않으며 언제나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의 재발견이다.
이 조금은 거창하게 들리는 이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세기 초반, 여성들이 남성 천문학자들을 위해 묵묵히 별을 계산하던 어느 조용한 천문대의 사무실로 다시 한번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유령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침묵 속에서 우주의 비밀을 밝혀낸 한 위대한 ‘생각의 협력’ 사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