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진 유리판, 별의 속삭임

제3부: 알고리즘의 제국 - 누가 우리의 생각을 훔치는가

by 한재영

제6장 생각은 혼자 오지 않는다


2절. 얼룩진 유리판, 별의 속삭임


191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 천문대. 밤의 장막이 내리면, 돔 형태의 지붕이 기이한 기계음을 내며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망원경이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하늘의 한 점을 향해 육중한 몸을 돌린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이 ‘거대한 눈’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엿보는 신성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찾아가려는 진짜 무대는 그곳이 아니다. 진짜 무대는 동이 트고 난 후, 천문대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고 비좁으며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사무실이다. 그곳은 당시 ‘컴퓨터(Computer)’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일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실리콘 칩으로 만든 기계가 아니라, 인간 컴퓨터, 즉 밤새 남자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촬영한 수천 장의 유리 건판 사진 속 별들의 위치와 밝기를 측정하고, 계산하고, 목록으로 만드는 고된 일을 하던 여성 계산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중 한 명인 헨리에타 스완 리비트(Henrietta Swan Leavitt)는 유난히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병약한 여성이었다. 리비트를 더욱 고립시킨 것은 점점 잃어가는 그녀의 청력이었다. 세상의 번잡한 소음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음소거되어 가는 두려움 속에서, 그녀의 세계는 무겁고 고독한 침묵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그 텅 빈 자리로 우주의 미세한 속삭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 뼈의 진동으로 피아노의 선율을 느꼈듯이, 그녀는 청력을 잃어가는 대신 밤하늘의 시각적 리듬에 자신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하버드 천문대장 에드워드 피커링은 여성들을 고용하고 그녀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비교적 진보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완고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여성 계산원들은 여전히 시간당 30센트—당시 공장 노동자들보다도 적은 임금—를 받고 고분고분하게 숫자만 만들어내는 '계산기'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피커링은 리비트의 섬세함을 눈여겨보고 변광성 연구를 전담시켰지만, 그녀에게 방대한 데이터를 '분류'할 것을 지시했을 뿐 그 이면의 의미를 '해석(이론화)'하는 것은 여전히 하버드를 졸업한 남성 천문학자들의 몫으로 선을 긋곤 했다. '계산기'의 역할은 오로지 계산일 뿐, 사유해선 안 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임무는 남반구 밤하늘에서만 보이는 마젤란 성운이라는, 당시에는 우리 은하에 속한 성운인지 아니면 외부의 독립된 은하인지조차 몰랐던 미지의 천체를 촬영한 수천 장의 사진 건판을 비교하며, 그 안에서 주기적으로 밝기가 변하는 특별한 종류의 별, 즉 ‘세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내고 그 변화 주기와 밝기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 노동의 질감은 지독하게 물리적이고 고단했다. 리비트는 별의 밝기를 측정하기 위해 천문대에서 조롱 섞인 농담으로 ‘파리채(Fly Spanker)’라 부르던 도구를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단순한 유리 조각이 아니라, 표준적인 밝기를 가진 별들의 이미지가 단계별로 찍혀 있는 일종의 ‘등급 척도(Scale of magnitudes)’였다. 이 투박한 척도를 거대한 사진 건판 위에 일일이 겹쳐 대보며 눈이 짓무르도록 밝기를 비교하는 일.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도 빛났던 그녀의 위대한 의지는 고상한 안락의자 위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잉크가 묻은 손끝, 시큰거리는 손목, 그리고 얼룩진 유리판과 작은 '파리채'가 끊임없이 마찰하며 만들어낸 몸의 노동이자 감각의 축적이었다.


그녀는 마치 거대한 직소 퍼즐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그것이 전체 그림의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전혀 모른 채 묵묵히 맞추어 나가는 장인과도 같았다. 만약 그녀가 단순히 지시받은 대로 데이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월급을 받는 일에만 만족하는 ‘기계’였다면, 혹은 데카르트적인 ‘설명’의 세계에만 머물렀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년간 이 희미하고 얼룩진 유리판 속 작은 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과 일종의 내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십, 수백 일의 주기를 두고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희미한 점들의 교대는, 철저한 침묵 속에 갇힌 그녀에게만 허락된 우주의 심장 박동이자 비밀스러운 모스 부호처럼 다가왔다. 그녀의 손가락 끝과 눈의 망막에는, 방대한 데이터뿐만 아니라 그 데이터와 함께한 시간과 노력이 만들어낸 미묘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축적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1장의 사냥꾼이 눈보라 속에서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살아있는 몸으로 세계와 깊이 관계 맺는 ‘감응’이었다.


어느 날 오후, 평소와 같이 지루한 데이터를 정리하던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의 순수하고 강력한 질문, 1장의 원시인이 밤하늘을 보며 처음 던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왜?’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왜 어떤 별은 주기가 짧고 빠르게 깜빡이는데, 어떤 별은 주기가 길고 느긋하게 숨 쉬는 것일까? 그리고 왜 유독 주기가 긴 별들이 압도적으로 더 밝게 보이는 것일까? 이 둘 사이에 어떤 숨겨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당시 남성 천문학자들의 견고한 영역을 흔드는 것이었다. 해석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지만, 그녀는 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수년간 기록했던 수천 개의 데이터 카드를 캐비닛에서 모두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그녀는 그 카드들을 강박적으로 다시 배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의 밝기 순으로, 다음에는 변화 주기 순으로. 그녀는 모눈종이 위에 점을 찍어 그래프를 그려 나갔다. 데이터 그 자체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수많은 점들과 숫자들의 무의미한 나열, 즉 의미가 제거된 ‘0과 1’의 연속처럼 보였다.


만약 그녀가 그 어두운 사무실에 완전히 혼자였다면, 이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 속에서 길을 잃고 결국 패턴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애니 점프 캐넌, 윌리어미나 플레밍과 같은 뛰어난 여성 ‘컴퓨터’들과 함께 일했다. 점심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혹은 퇴근길에 함께 걸으며, 그녀는 자신의 어렴풋한 생각을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애니, 네가 관측한 저쪽 성운의 세페이드 변광성들은 어때? 거기도 주기가 긴 별들이 더 밝던가?” “윌리어미나, 당신이 지난달에 기록한 데이터와 내 데이터를 합쳐서 그래프를 다시 그려보면 뭔가 새로운 패턴이 보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생각의 고리’가 시작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다. 그녀의 감응 담긴 질문은 동료들의 경험과 그들이 가진 또 다른 방대한 데이터와 만나고, 대화와 토론 속에서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고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저 마젤란 성운이라는 한 구역에 모여 있는 별들은 지구로부터 대략 같은 거리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눈에 더 밝게 보이는 별은 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라, 실제로도 더 밝은 별일 수밖에 없다!" 이 빛나는 직관적 통찰은 그녀를 확신으로 이끌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법칙을 이용해서 우주의 거리를 잴 수 있지 않을까?"


수개월간의 끈질긴 추가 분석과 동료들과의 협력적 검증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우주의 가장 깊은 비밀을 여는 위대한 열쇠를 발견했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그녀의 예감대로, ‘변광 주기가 길수록 그 별의 절대적인 밝기(absolute brightness)가 더 밝다’는 명확하고 아름다운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문학사를 바꾼 ‘주기-광도 관계(Period-Luminosity Relationship)’의 발견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마치 우주 곳곳에 서 있는, 깜빡이는 속도만 알면 원래 밝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신비한 등대와 같았다. 마치 멀리 있는 등대의 깜빡이는 주기만 보고도 그 전구가 몇 와트짜리인지 알아맞히는 것과 같았다. 이 '절대 등급'의 기준점은 마침내 인류가 우주의 광활한 거리를 잴 수 있는 경이로운 '우주의 자(Cosmic yardstick)'가 된 것이다.


그녀의 발견 덕분에, 에드윈 허블과 같은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수백만 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거대한 외부 은하라는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까지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위대한 법칙을 발견하고 논문을 썼을 때조차, 그 논문의 대표 저자 이름은 그녀가 아닌 천문대장 피커링의 차지였다. 그녀의 논문에는 "이 연구는 리비트 양이 준비했다(prepared by Miss Leavitt)"는 건조한 한 줄만이 덧붙여졌을 뿐이다. 살아있는 '계산기'들의 노고는 온전히 그것을 소유한 자의 전리품으로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발견이 허블에 의해 우주 팽창을 증명하는 데 쓰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21년 53세의 나이로 위암에 걸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3년 뒤인 1924년에 일어났다. 스웨덴 한림원의 저명한 수학자 망누스 미타그레플레르(Magnus Mittag-Leffler)가 그녀의 업적에 경탄하여 그녀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강력히 추천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지만, 노벨상은 사후의 인물에게는 수여되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에 무산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비록 그녀를 기계 취급했을지라도, 이미 그녀가 남긴 사유의 흔적은 노벨상마저도 닿지 못할 만큼 높고 거대한 우주의 이정표가 되어 있었다.


헨리에타 리비트의 위대한 발견은 고독한 천재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홀로 떠오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장의 얼룩진 유리 건판이라는, 당시 기술로는 최첨단이었던 방대한 데이터 (오늘날 AI의 역할)


시간당 30센트짜리 노동의 땀방울과 잃어버린 청각 속에서 피어난 내밀한 감응 (인간 고유의 역할)


그리고 동료 ‘컴퓨터’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협력, 비판적 검증 (사회적 역할)


이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의 아름다운 고리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마침내 위대한 결과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 전체를 통해 제안하고자 하는 ‘생각의 고리’의 핵심이다. 사고는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서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른다. “알파고의 37수처럼, 지금의 AI는 인간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새로운 수를 창발해 내지 않는가? 생각의 고리에 굳이 인간의 감응과 육신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기계에게 밀려나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낭만주의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아주 합당하고 날카로운 의심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계가 뱉어내는 ‘새로움(Novelty)’과 진정한 의미의 ‘창발(Emergence)’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계는 방대한 데이터 공간 안에서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낯설고 효율적인 패턴, 즉 ‘새로운 조합’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기계 자신은 그 새로운 패턴이 왜 아름다운지, 그것이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해석하는 데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영원히 알지 못한다. 알파고의 37수가 바둑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창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계가 그 수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낯설고 기괴한 수 앞에서 필멸의 인간(이세돌)이 당황하고, 고뇌하고, 마침내 경외감을 느끼며 바둑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해 냈기 때문이다. 의미는 기계의 회로 속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며 전율하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창발한다.


기계의 지성은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매끄러운 ‘정답’을 산출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의 경계를 허물고 규칙 너머를 향해, 혹은 누가봐도 완벽해보이는 정답을 향해 “왜?”라는 불온한 질문을 스스로 잉태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의미의 창발적 도약은 오차 없는 완벽한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먹먹한 정적 속에서 리비트가 별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듯,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근원적인 ‘답답함’과 투박한 ‘마찰열’ 속에서 그것은 비로소 점화된다. 앞선 절의 두 건축가가 낡은 술집에서 나누었던 그 무거운 ‘침묵’처럼, 진정한 사유에는 서로의 미숙함과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보듬는 끈끈한 공감의 시간마저 포함되는 것이다.


상처받을 육신도, 타인의 고통에 함께 떨리는 마음도 없는 AI 단독의 사고가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를 삼킨다 한들, 결국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이 뜨거운 감응의 연대가 생략된 채 기계가 내놓은 차가운 효율성만을 온전한 '사고'로 착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완벽한 논리로 가장 비인간적인 결정을 서슴없이 내리는 끔찍한 역설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고통의 무게를 모르는 지성이 설계한 최적화된 세계에서, 상처 입고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간의 자리는 그저 소거되어야 할 비효율적인 변수(오류)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기계 혼자 완성해 툭 던져주는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청각 대신 별의 박동을 느꼈던 리비트처럼, 나와 너, 인간과 기술, 질문과 대답, 그리고 차가운 데이터와 뜨거운 감응 사이의 끊임없는 공명과 순환 속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처럼 웅장하게 함께 연주되며 탄생하는 것이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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