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나를 자른 회사가 준 마지막 효도 자금

엄마의 환갑, 눈물의 퇴직금이 명품백으로 바뀌던 날

by 바람

권고사직 통보를 받고, 회사에서 준 한 달간의 유예 기간을 꾸역꾸역 버텨냈다. 그렇게 마침내 사원증을 반납하고, 소속 없는 온전한 '백수'가 된 바로 첫 달. 하필이면 그때가 엄마의 환갑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우리 집 저울은 늘 동생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막장 차별까지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유학 자금이나 목돈이 필요할 때) 부모님의 지갑은 늘 동생을 향해 열렸다.


반면 나는 '손이 덜 가는 아이'였다. 굳이 챙기지 않아도 어디 가서 제 밥벌이는 할 것 같은, 그런 듬직함이 오히려 내 발목을 잡았던 걸까.


"너는 알아서 잘하니까 믿는다."


그놈의 '믿음' 때문에 나는 늘 뒷전이었다. 한정된 집안의 지원이 동생에게 흘러갈 때, 나는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그 빈자리를 메웠다. 머리로는 '형편상 어쩔 수 없지' 이해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힘들다고 징징거렸으면 좀 도와줬을까?


대학 시절, 휴학하고 공장 야간 2교대를 뛰며 번 돈으로 엄마에게 장지갑을 사드린 적이 있다. 몇십만 원짜리, 나름 큰맘 먹고 산 선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깝다"며 그 지갑을 장롱 깊숙이 처박아 두고는 끝내 쓰지 않으셨다. 아껴 쓰겠다는 마음인 걸 알면서도, 낡아빠진 지갑을 계속 고집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마치 내 마음이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엄마와의 거리는 영영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나를 잡아준 건, 그 무뚝뚝한 엄마였다.


마음의 병을 얻어 무너져 내리던 날, 나를 질질 끌고 상담센터에 앉혀 놓은 것도, 본인의 쌈짓돈을 털어 나를 버티게 해 준 것도 엄마였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그 기억이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빠듯한 살림에 자식 둘 건사하느라 억척스러워져야 했던 사람. 나에게 쏟아졌던 그 모진 잔소리와 호통이, 사실은 무너지지 않으려는 당신만의 비명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엄마'라는 딱지를 떼고 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교양 있는, 그저 외로운 중년 여성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곧 백수가 되고, 다시 가난한 만학도가 될 예정이다. 돈으로 하는 효도는 당분간 꿈도 못 꾼다. 회사에서 쫓겨나며 받은 뼈아픈 퇴직금이지만, 어쩌면 이건 신이 엄마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한번 하라고 쥐여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스치듯 흘린 환갑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나는 스파이처럼 본가에 들러 엄마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그리고 백화점으로 달려가 작고 검은색 로고가 박힌 명품 가방 하나를 샀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가방이었다.


엄마의 환갑을 축하하며. 내 생애 첫 명품 선물

근사한 파인다이닝 식당, 떨리는 마음으로 가방과 함께 여러 번 고쳐 쓴 편지를 건넸다. 말로는 차마 못 전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꾹꾹 눌러 담았다.


드라마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며 포옹하는 장면까진 아니더라도, 내심 살짝의 눈물은 기대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역시 엄마였다. 눈물 대신 묵묵히 가방 가죽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받으셨다. 하지만 그날 엄마 입가에 번지던 옅은 미소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엄마는 여전히 그 가방을 모셔두느라 잘 들고 다니지 않으신다. 하지만 딱 한 번, 지인의 결혼식장에 그 가방을 들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친구들이 다들 가방 예쁘다고, 딸이 사줬냐고 부러워하더라."


그 무심한 한마디면 충분했다. 비록 장롱 속에 있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엄마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준 그 순간만으로 내 퇴직금은 제 몫을 다했다.


통장은 비었지만, 내 마음속 굳어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녹아내렸다. 이제야 나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학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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