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가 말해주지 않은, AI가 초래할 진짜 미래

우리는 왜 AI를 두려워하는가?

by GreenT

인류는 지금 거대한 변화가 태동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수많은 기업의 CEO와 전문가들은 저마다의 근거를 내세우며,
이르면 2030년 전후로 AGI라는 결정적 변곡점이 도래할 것이라
입이 닳도록 떠들어댄다.


그러나 굳이 몇 년 뒤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키오스크의 확산과 취업시장의 위축이라는 불길한 징후들을
이미 일상 속에서 충분히 체감하고 있다.


이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리고 그 끝에 과연 우리의 자리가 남아 있을지,
누구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불안 속에서도,
일부 기술 낙관론자들은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꾼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언젠가는 돈의 의미조차 희미해지고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올 것이라는,

뭐 그런 꿈같은 미래 말이다.


물론 그런 꿈같은 미래가 오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좋은 의도로 시작된 기술’이

언제나 인류를 구원해 온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인류를 위해 개발된 핵에너지는 핵폭탄이 되었고,
광산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발명된 다이너마이트는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기술의 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이 그 결과를 결정해 왔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얼마나 긴 과도기를 지나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할지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위기의 순간이 처음은 아니다.
IMF 외환위기, 산업혁명,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인류는 숱한 붕괴와 전환의 국면을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직업과 삶의 방식이 사라졌고,
많은 이들이 도태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살아남았다.
이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자리에 남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불안이 극대화된 상황일수록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바라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인 채,
그것을 무작정 부정하거나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회피가 아니라 이해다.
지금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이 두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인류의 발전사를 간단히 되돌아보자.
인류가 이뤄낸 위대한 진보의 시작에는
대개 인간의 사소한 호기심이 있었다.


불을 다루고, 도구를 만들고, 별을 관측하고,
사고를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언제나 미지의 것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호기심은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바늘이 가면 실이 따라오듯,
미지를 향한 호기심은 언제나 불안과 함께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불안을 견디기 위해
미지의 것을 정복하고, 설명하고, 정의하려 했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이 자연을 해석하려 애썼던 이유도,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종교가 만들어진 이유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


또 이러한 집착은 인간 존재의 의의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우리는 살아 있음을 분명히 느끼지만,
정작 내가 누구인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어떤 이유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지하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하려 노력해왔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가 인간의 본질을 두고 논쟁했던 것처럼,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AI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시도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는
타자를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려는 욕망으로까지 변질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만들어왔다.


인간을 닮은 외계인,
인간을 닮은 로봇,
그리고 인간의 사고를 흉내 내는 AI까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비추기 위해 만든 그 거울은
단순한 반사를 넘어
인간을 인간이라 정의해 온 영역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인간의 증명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제 AI는 디오게네스처럼

인간의 정의의 모순을 들추며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믿어온 그 정의가

과연 인간을 설명하기에 충분한지 묻고 있다.


다시 말해,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인간이라는 존재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이 되었다.


우리를 닮은 존재가 우리를 뛰어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제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아마도 AI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미지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존재 의의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뒤섞인
하나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원시 인류가 더 발전한 인류 집단에 의해
도태되었을 가능성을 떠올려보면,
인간은 언제나 ‘더 뛰어난 존재의 등장’을
멸종의 가능성과 연결지어 인식해 왔다.


오늘날 AI를 향한 시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호기심, 자기확인의 욕망,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뒤섞이며
지금의 복합적인 감정이 만들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AI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AI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생존경쟁에서 밀려거나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려움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막연한 불안을 직시하고,
오롯이 현재의 상황에 집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안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 막연한 불안을 글로 적어 구체화하는 것.


둘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


셋째,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


당장 눈앞에 불안에 정신이 팔리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일단 두려움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일이 먼저다.


AI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오래도록 반복해 온,
우리를 발전시키고 살아남게 만든
지극히 인간적인 생존 본능이다.


그러니 두려워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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