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의 성실함은
왜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하는가

알파고가 무너뜨린 세계, 그리고 그 너머에서

by GreenT

오늘은 간단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 보려 한다.


혹시 여러분은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알고 있는가?


자기계발 서적이나 강연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이는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슨(Anders Ericsson)의 연구를

말콤 글래드웰이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소개하며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

‘누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 이상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분야든 1만 시간을 투자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필자에게는 있다.


채 고등학생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내가 그 방대한 시간을 쏟아부었던 대상은

컴퓨터도, 독서도, 게임도 아닌

바로 체스바둑이었다.

스무 살이라는 내 나이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취향이지만,

체스와 바둑에 관심을 갖게 된 경위는 대략 이렇다.


유년 시절, 나는 또래보다 산만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 아이였다.

외동인 나를 걱정하셨던 어머니는

내 집중력과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를 동네 문화센터의 체스 교실에 데려가셨다.


처음 몇 년은 그저 단순한 취미였다.

머리를 쓰는 것도 재미있었고,

이기고 지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웠다.

각종 대회에도 나가고,

집에서는 심심할 때 온라인으로 체스를 두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체스를 정말로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체스를 배우고 난 뒤부터

뛰어노는 것보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좋아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지도자의 권유로 나는 바둑까지 배우게 되었다.

바둑은 체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게임이었다.

수는 훨씬 방대했고,

그만큼 전략과 사고의 깊이도 더 요구되었다.


매번 마주하는 새롭고 다양한 수들이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내 취미는 욕심이 되었고,

바둑이라는 게임은

동네 학원을 넘어

프로 기사를 양성하는 ‘연구생’의 세계로까지

나를 이끌었다.


그곳은 동네 바둑학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막힌 수읽기를 해내는 영재들뿐이었다.

좌절도 많았지만

‘배운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버텼다.

바둑을 두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바둑이라는 취미는 중학생까지 이어졌다.


체스부터 시작해

나는 스무 해 인생 중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흑과 백의 판 위에서 보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만 시간의 법칙도,

성공하는 방법도 몰랐지만

그저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했고,

가장 좋아한다고 믿었기에 그냥 계속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바꾼

그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2016년 3월 9일,

내가 켜켜이 쌓아 올린 10년의 시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순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컴퓨터가

바둑계 최강이라 불리던 천재와

대국을 벌인다는 소식에

나는 헐레벌떡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똑똑히 목격했다.


인류 최고의 천재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시간이,

내 전부였던 세계가

고작 몇 달의 학습을 거친 기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를.


충격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격차는 잔인할 정도로 벌어졌다.


알파고 4승, 이세돌 1승.


말로 형언하기 힘든 상실감이 봇물처럼 밀려왔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계 최고의 체스 마스터가

컴퓨터에게 쓰디쓴 패배를 당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10년이라는 청춘을 쏟아부은 분야가

통째로 정복당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마주했을 때,

그 상실감의 무게는 전혀 달랐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계 최고가 된들,

저 기계보다 못하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만 시간의 성실함이

단 몇 초의 연산 앞에 무색해지는 순간,

나는 반평생을 함께한 바둑판을 떠났다.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잊지 못할 상실감을 안겨준

‘알파고’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프로그래머에 대한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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