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부유한 사람이 말하는 ‘돈의 종말’

그리고 다가오는 AI란 빙하기

by GreenT

얼마 전 일론 머스크의 한 인터뷰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돈의 의미가 사라질 것이며,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AI가 생산성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모두가 충분한 부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의 말만 놓고 보면 분명 꿈같은 미래다.
불안정한 일자리도, 생존을 위한 경쟁도 사라진 세상.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미래가 우리 모두에게 꿈같은 세상일까?

아니면 그와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유토피아일까?


우리는 흔히 ‘미래’라는 단어를 하나의 풍경처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언제나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도착하지 않는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이들이 살아남는 방향따위는 없다.

AI로 발전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태되고 소수의 이들만 그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의 멸종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돈의 종말을 말하는 세계 최고의 부자


조금만 시선을 바꿔 보면 이 장면은 꽤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돈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머스크에게 돈은 이미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돈은 기술을 만들고, 기업을 움직이고, 산업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수단을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칠만큼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생존을 걱정할 필요도, 선택지를 고민할 이유도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돈은 여전히 다르다.
돈은 생존이고, 접근권이며,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옳고 그르냐의 문제라기 보다,
자신이 경험과,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위치의 차이에서 나온다.


이는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미래라도, 누군가에게는 확장이고

누군가에게는 축소이며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우리는 왜 그의 말을 그리도 쉽게 받아들일까


인류의 발전 역사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늘 ‘성공한 사람’, ‘권위 있는 인물’, ‘압도적인 성과를 낸 사람’들을

그 사람의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불안한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좋은 취지의 기술의 발전조차도, 저절로 모두의 삶을 개선해 준 적은 거의 없었다.


기술은 언제나 가능성을 넓혔지만,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갈등과 희생, 그리고 수많은 탈락자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나 혹은 당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기술은 늘 먼저 불균형을 만들었다


산업혁명, 자동화, 정보화 시대를 거치며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그 혜택은 처음부터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항상 먼저 이익을 가져간 쪽은 자본과 기술을 통제한 소수였다.

이는 AI 역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일론머스크는 기술의 발전이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기업은 사회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닌, 그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집단이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믿어버리게 된다.


어쩌면 AI는 우리를 구원해줄 구원자, 꿈의 기술 같은 것이 아니라.

비용을 줄이고, 인력을 대체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 결과는 단순한 풍요가 아니라, 경제적 극단화일 수도 있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없는 자들은 점점 더 시스템에 의존하며 가난해지는, 그런 세상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비관이 아니라,

지금까지 기업이 기술을 활용해온 방식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예측일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는 어쩌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긴 ‘빙하기’일지도 모른다.


빙하기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얼어 죽지 않는다.

대신 서서히, 조용히 죽어간다.

혹은 아래와 같이


누군가는 불을 키우고,

누군가는 불을 관리하며,

누군가는 불 근처에 머물 자격을 얻기 위해 조건을 맞춘다.


그리고 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선택지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머지않아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게되는 순간,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플랫폼, 알고리즘, 시스템에 접근할 권한을

‘요청’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동전을 구걸하는 가난이 아니라,

기회와 선택권을 구걸하는 가난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글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낙관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낙관에만 기대 현실을 잊지는 말라는 것이다.


만일 미래가 정말 유토피아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미래가 빙하기라면,

아무 준비 없이 낙관만 믿은 사람은

가장 먼저 비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얼마나 더 좋아질까?”

우리가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질문은 단 하나다.


“그 미래에서, 나는 어떻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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