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지친 위로보다는 진심 어린 혼쭐
딸아이의 반에는 독서에 관한 규칙이 있다.
교실에서는(아침 독서시간, 쉬는시간, 점심시간 활용) 담임선생님께서 지정해주신 책('온책'이라고 칭함)만 읽기. 선생님께 다 읽었다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검사는 책 내용에 관한 랜덤 퀴즈 맞추기이다. 이 퀴즈를 맞추는 사람은 다음 온책을 읽을 수 있단다. 그런데 퀴즈를 못 맞추면, 통과 못 한 온책을 다시 더 꼼꼼히 읽고 검사받아야 한단다.
딸아이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본인만의 취향에 따라 비슷비슷한 책만 골라 읽는다. 하지만 담임선생님께서 온책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지정해 주시니 평소와 다른 스타일의 독서를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퀴즈 맞추기를 위해 좀 더 정독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담임선생님의 독서 교육관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하교한 딸아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학교에서 끙끙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오늘 퀴즈 못 맞춰서 온책을 또 다시 읽게 됐어. 200쪽 넘는 건데 어떻게 지겨워서 또 다시 읽어. 다른 책 읽고 싶단말야. 그리고 퀴즈 못 맞춘것 자체도 너무 창피해. 선생님이 나한테만 어려운 문제 내셨어. 다른 친구들 퀴즈문제들은 다 쉬운 거였던 말야."
처음 들었을 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꽤 이미지관리를 하는 딸아이는 선생님께 칭찬 받는 아이, 모범적인 아이로 보여지고 싶어한다.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싶고,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어려운 퀴즈문제도 맞추고 싶었을 텐데.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읽었을 것 같은데. 어쩌다 조금 어려운 문제 차례에 걸렸나 보구나.
"우리 딸, 열심히 읽었을 텐데 허탈하고 속상하겠다.'라고 토닥토닥 안아주자마자....
"난 열심히 노력했는데 선생님이 내가 노력한 줄 모르면 어떡해. 내 노력이 소용이 없어져서 속상해서 더는 못 읽겠어!! 이거 말고 다음 온책 읽고싶은데!! 다시 퀴즈 맞출 때까지 쉬는 시간에 마음 편히 놀지도 못 하잖아! 그리고 아침 일찍 등교해도 도서관에도 못 가고 교실에서 온책만 지겹게 읽어야 하잖아!!"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딸-
"에고, 속상하겠다 진짜. 근데 안타깝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늘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야. 엄마도 학생 때 엄청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내가 놓친 부분에서 시험문제가 나와서 시험을 망친 적도 있어. 살다 보면 가끔 노력이 소용없어졌다고 여겨질 때가 있긴 해. 학교 다닐 때 그런 경험을 하면서 마음이 강해지는거야. 그래야 어른이 돼서 어려운 일을 겪어도 견딜 수 있지. 선생님께서 너희들 그러라고 독서 규칙을 만드신 것 같은...."
"엄마!! 내가 이렇게 속상한데 왜 선생님 편만 들어!!! 선생님이 너무한거잖아!! 내가얼마나!@#$!##!#"
목소리가 커지는 딸. 점점 아무말이나 막 던지며 울부짖는 딸의 징징거림을 참고 들어주기 어려워진 나는 또 버럭하고 말았다.
"야!! 그래서 뭐 어쩌란 거야! 이깟 일에 그렇게 하늘이 무너지듯 속상하면 어떻게? 니가 학교 학생이지 유치원 어린이집 다니는 애기야?? 애기들이나 지 하고 싶은 것만 하지!! 원래 학생이 됐으면 하기 싫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 있는거야!! 학급 규칙이 정해졌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따르는거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거 이왕이면 좋은 마음으로 하는게 낫지!! 그렇게 꼭 해야 할 일을 징징거리면서 해야겠어??"
"엄마!! 나 힘든데 왜 엄마까지 그래? 나 노력했다고!! 힘들어도 노력했단말야!!내가 얼마나!@#!@%@#@~~"
더이상 못들어주겠다...
"니가 잘못된 방법으로 노력했을수도 있지!! 이번 기회에 책을 좀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고 다짐해야지!! 내 노력이 헛됐다고 징징대면 뭘해!! 결과를 바꿀 수도 없는데!!! 그럼 엄마가 나서서 우리 딸만 왜 어려운 퀴즈 내셨냐고 따질까?? 안되겠다. 니 징징거리는 거 못 들어주겠다. 당장 너네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따질거야!! 선생님 퀴즈 때문에 우리 딸이 집에서 징징거리면서 날 못살게 군다고!! 따질거야!!!! 그러면 선생님이 널 뭐라고 생각하실까?! 두고 봐!!"
나는 폰을 들어 담임선생님의 연락처를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역시 울음을 뚝 그치는 딸-
"엄마!! 선생님께 절대 연락하지 마!! 나 안 울게!! 그냥 다시 해볼게!! 엄마가 선생님한테 따지만 나 너무 아기같아서 창피해!!!!!!"
"너 이러는거 창피한 일인지 몰랐어?? 너 창피한 애니까 어디 창피 당해봐!! 선생님 전화번호가 여기...."
"엄마!!!!그만!!!그만!!나 온책 다시 열심히 읽을거야!!!!"
..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다음 날..
딸아이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엄마. 읽었던 책 또 읽으면 지겨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한번 더 읽으니까. 더 금방 읽게 되고. 그리고 처음에 읽을 때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도 더 자세히 읽게 됐어. 이틀 뒤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때 또 만약 어려운 퀴즈 문제가 나오면 어쩌지....그래도 열심히 해볼래."
오, 태도가 급 변했다. 역시..호되게 혼이 나야 하는건가..
며칠 뒤 딸아이는 온책을 다 읽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번에는 퀴즈를 내지 않고, 두 번씩이나 열심히 읽은 딸아이에게 수고했다며 칭찬하셨다고 한다. 다음 온책도 열심히 읽으라는 격려와 함께-
앞으로 딸아이는 많은 도전을 하고, 실패도 많이 할 것이다.
온책 퀴즈 풀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한 시험들을 많이 보겠지.
안타깝지만 내가 대신 도전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옆에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수밖에.
나는 우리 딸아이가 실패했을 때, 좌절하고 속상해할 때 경청과 위로와 공감을 충분히....아니 딱 한 번만 해 주고.. 앞으로도 이렇게 뼈아프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혼쭐을 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