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다고 사회성이 좋은 것이 아니다.
대학시절 선배 L은 과 어느 모임에서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모임에 나가면 별로 친하지 않은 선후배와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일이 고역이었는데, 그 선배는 끊임없이 큰 소리로 말을 잘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L선배의 말에 집중했다.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어서 시끌벅적한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억지로 그런 곳에 있어야 할 때면 L선배가 부러웠다. 저렇게 활발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L선배. 저런 게 바로 사회성 좋다는거구나.. 싶었디.
그날도 내키지 않는 술자리였다. 학과 중요한 행사 모임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갔다. 나름 예쁜 옷을 골라 입고 나간다고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간 내게 L선배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너는 짧은 치마 입으면 안 되겠다. 딴 덴 다 날씬한데 다리가 너무 짧고 굵은데?
이제 너는 짧은치마 입지 마. 긴 치마나 바지를 입어. 그게 너한테 딱 어울려."
L선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나를 흘끗거렸고,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L선배가 변명인지 그냥 막 던진 말인지 이렇게 지껄였다.
"내가 너 더 이뻐지라고 말 해주는거야. 아끼는 후배라서! 내가 좀 솔직한 편이라 돌려말하기를 잘 못해."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동조하며 말했다. "맞아, L 얘가 좀 말을 직설적으로 해도 마음은 착해. 이런 애가 뒤끝도 없어. 성격이 시원시원 좋다니까."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나는 기분이 매우 나쁜데. 하지만 선배와 그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애써 웃었고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원래 활발하고 사회성 좋은 사람들끼리는 저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며 어울리고 지내는가보다-하면서.
하지만 L선배는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과체중인 여자 후배에게 진작에 날씬한 몸을 만들었어야 남친에게 차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했고
키가 작은 남자 후배에게는 신발에 깔창을 깔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여자들은 키 작은 남자는 아무리 능력 있고 잘 생겨도 안 만나준다고 했다.
20대 초반부터 탈모가 찾아와 고민인 후배에게는 정수리에 두피가 다 보여서 흉하다며 모자를 쓰고 다니라고 훈계하기도 했으며
주걱턱이었던 후배에게는 너는 옷을 살 게 아니라 그 돈을 모아서 턱교정부터 해야겠다고 말했다.
모두에게 진심으로, 솔직하게, 너희를 아껴서 그런 것이라며 뒤끝은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처음 봤을 때 인기도 많고 사회성도 좋아보이던 L선배는,
대학졸업할 때 즈음엔 생각보다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왁자지껄한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시간을 내서 따로 약속 잡고 L선배와 둘이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은근히 L선배와 대판 싸우고 적이 된 사람도 종종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배는, 솔직하고 뒤끝 없이 시원시원한 성격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무례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인의 재미와 통쾌함을 위해 할 말 못할 말을 구분하지 않고 다 뱉는 사람.
활발하고 사회성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눈치 없이 나대고, 무례한 것이었다. 아무리 활발하고 말을 많이 해도, 사회성이 오히려 현저히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사회성이 좋다는 것은 대화를 유창하게 하고, 대인 관계가 좋고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두 가지 중 유창한 대화에만 초점을 맞춰 사회성을 평가했다. 아무리 대화를 잘 하고 대인 관계가 넓어도, 그 대화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비호감이 된다면 사회성은 굉장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특수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에게 사회성 교육을 할 때, 상대방에게 어떻게 다가가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먼저 가르치지 않는다. 사실 나도 내성적이라 그런 것에는 자신이 없다.내
내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라. 그게 가장 먼저 갖춰야 할 태도다"이다.
일단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안 주면,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떨어지진 않는다. 적어도 0에서 차근차근 호감도를 키울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좀 더 익숙해지고 편안한 사이가 되면 일상적인 대화 한 마디씩 오가면서 서서히 친밀감을 키울 수 있다. 사회성은 그렇게 천천히,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양적인 대화에만 초점을 맞춰 마구 들이대서는 안 된다. 건강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면 닭고야 식단을 짜고 PT를 결제하는 것부터가 아니라, 매일 마시는 맥주와 시도때도 없이 주워 먹는 쿠키를 끊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