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존슨 증후군 투병은 고비를 넘기고 나서가 시작이다.
1995년 당시 스티븐존슨 증후군은 치사율이 80%까지 이를 수 있는 병이었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치사율이 현저하게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후유증은 여전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열이 오래 지속되거나 탈락된 피부조직을 통해 합병증까지 생긴다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급성 질환이었다. 다행히 나는 죽을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스티븐존슨 증후군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스티븐존슨 증후군의 긴 투병 여정은,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순간부터 지독하게 시작됐다.
스티븐존슨 증후군을 앓기 전, 초등학교 1학년 여름 M이라는 공포 드라마를 온 가족이 즐겨 보았다. 지금 어쩌다 추억의 영상으로 M의 짤들을 보면 90년대의 중국 강시영화만큼 웃기지만, 당시 어린 나이에 본 M의 장면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특히 M으로 변한 심은하님이 어떤 남성이 잠든 사이 호스를 통해 무언가를 그에게 뿌리자, 다음 날 그는 온 몸의 피부가 벗겨져 괴물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었다. 엄청난 공포감을 느껴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는 내가 M에서 괴물처럼 변한 남자와 비슷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사색이 된 나를 보며 엄마는 병실의 거울을 치워버렸다.
"지금은 병이 난 지 얼마 안 돼 아파서 그래. 서서히 다시 예쁜 네모습으로 돌아올거야"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철썩같이 믿으며 안도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퇴원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예쁘장한 아이로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 날 이후 한 달 간 입원해 집중치료를 받았다.
피부는 매일매일 드레싱을 해야 했다. 얼굴과 상반신 전체의 피부가 전부 벗겨진데다 수많은 반점들도 딱지가 앉기 시작해 가려웠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 했던 드레싱처럼 너무나 아파 울부짖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드레싱의 고통은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도 했지만 나도 드레싱 처치에 적응이 돼 그런 것 같다. 첫날에는 하는 내내 울었던 내가, 마지막 드레싱 처치날에는 울지 않고 간호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할 수 있었다.
눈꺼플 위로도 피부가 벗겨졌다가 딱지가 생겨 눈꺼플을 가로막는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눈꺼플만이 아니라 각막도 얼굴 피부처럼 다 벗겨져 아파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매일 스테로이드, 항생제 안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듀라티얼즈 안연고(피부로 치면 바세린과 같은 약이다)를 마치 파레트에 물감을 짜듯 듬뿍 넣었다. 그리고는 거즈로 눈꺼플을 눌러 눈을 아예 가리고 있었다. 어쩌다 거즈를 떼고 눈을 뜨면 너무 부시고 쓰라렸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가리고 누워있었다. 기력은 조금씩 회복되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앞을 볼 수 없으니 소변보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누워만 있었다.
입원한 지 2주쯤 됐을까, 두피 쪽이 너무 가렵고 따가워 손을 가져가봤더니 온통 오톨도톨한 물집이 만져졌다. 드레싱 처치로 샤워를 못 하니 자연스레 머리를 감지 못했고, 게다가 누워만 있으니 두피에 염증이 심하게 생겼다. 피부과에서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두피의 물집을 콕콕 짜내고 약을 발랐는데 그 과정도 너무나 쑤시고 아파 엉엉 울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갑자기 배가 아팠다. 생각해 보니 입원한 이래로 대변을 보지 못했다. 혀에 백태가 생긴 이후 병원에서 매 끼 제공되는 미음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냈기 때문인지 대변이 마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20일만에 대변을 보니 항문이 너무 아팠다. 대변이 너무 딱딱하기도 했다. 엄마랑 간호사선생님은 내 배를 마사지해주고 항문 쪽을 자극해주며 도와주셨다. 나중에는 대변이 조금 나오자 간호사선생님께서 비닐장갑을 끼고 대변이 나오도록 잡고 빼 주셨다. 그렇게 대변을 보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나보다. 엉엉 우는 나의 엉덩이를 엄마가 휴지로 닦아줬는데 피가 흥건했다. 그 뒤로는 또 대변볼 때 아플까봐 미음을 억지로 많이 먹고, 물도 많이 마시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엄마 손을 잡고 병실 안에서 걸어다녔다. 혀의 백태도 그 시기쯤 되니 거의 사라지기도 했다.
입원 첫 날 끙끙 앓으며 울기만 했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나 간호사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 만큼 회복됐다. 테이프로 동화를 듣기도 했다. 피부는 아직 얼룩덜룩하고 거즈로 감싼 눈 때문에 앞은 보지 못했지만 9살 아이의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입원 한 달 후, 의사선생님께서는 오늘이 마지막 드레싱이라며 이제 퇴원해도 좋다고 하셨다.
눈꺼플을 누르던 거즈도 떼 주셨다. 눈을 뜨자 여전히 눈이 매우 부시고 흐릿했지만 앞이 보여 혼자 걸어다닐 수 있었다.
엄마아빠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나도 집에 돌아갈 생각에, 그리고 학교에서 2학년이 돼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설렜다.
그땐 퇴원하고 몇 번만 병원을 다니면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피부의 얼룩덜룩한 흉터자국이 깨끗이 낫는 데는 10년이 걸릴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아주 오랜 기간 정기적으로 피부과에 다니며 치료받아야 할 것이고,
눈도 서서히 회복되겠지만 30년 가까이 지나도 완벽하게 낫진 못할 것이고, 아니 어쩌면 평생 안과를 다니며 안약을 넣으며 지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중적인 입원치료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통원 치료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