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숙제처럼 여겨지는 사람
직장인들은 여가시간이 생기면 여행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여행지에서 명소를 구경하기도 하고, 예쁜 사진도 찍고, 맛집도 가고, 소중한 사람과 추억을 만든다고.
생각만 해도 설렌다고 말한다. 그 여행을 위해 꾸역꾸역 직장생활을 버틴다고도-
주변의 버킷리스트들을 살펴봐도 상당수가 '세계 여행하기'를 포함한다.
그만큼 사람들은 어행을 좋아한다. 국내보다는 해외 여행을 선호하고, 단기보다는 장기 여행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수록 의미있게 여긴다.
시간도 있고 돈도 있는데 여행을 안 가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은근히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지루하고 따분한 인생을 사는.. 심하면 미련한 사람으로 여긴다.
"나는 여행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라고 소신(?)발언이라도 하면...
너무 따분하고 무료하지 않냐... 아직 제대로 된 여행을 안 해본 것이 아니냐.. 인생의 큰 재미를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니냐... 각종 연민과 훈계가 날아오곤 한다.
나는 직장인이지만. 게다가 여행을 좀 쉽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이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직장 특성상 여름, 겨울방학 시즌에 여행을 꾸준히 다녔다. 20대 풋풋한 시절에는 내일로 기차여행도 하고, 혼자 훌쩍 가까운 해외에 다녀오기도 했다. 신혼일 때는 좀 장거리로 길게도 다녀오고, 간간히 짧게 동남아 휴양지도 다녀왔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말문이 트이자 가족여행을 20일 남짓 해외로 다녀오기도 했다.
여행 중 순간순간 즐거움은 있었다. 일상에서 보지 못하던 풍경들을 마주할 때 놀랍고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그런 풍경을 볼수록 유튜브 영상으로 볼 때보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년 전 여행지 사진만 보던 때와는 달리, 최근 몇 년간 여행 유튜버들의 고화질 영상이 수없이 나오며 이제 그 영상 자체도 지겨워졌고, 굳이 그렇게 지겹도록 눈에 익은 풍경을 실제로 본다고 해서 감흥이 새롭지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아이를 키우며 에너지가 소진된 것인가 했는데,
음.. 생각해보니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나들이든 여행이든 낯선 야외로 가는 것을 그닥 설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날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시며 "이것 봐라 멋지지" "우와~~ 여기좀 봐! 창밖좀 보라니까? 여기 와서 서봐. 사진 찍어야지! 이것 보렴. 나오니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니"라는 말을 계속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지만. 그런 게 별로 재미있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 너무 실망하실 것 같았다. 또한 그런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란 음침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음 재밌네. 음 좋아. (영혼 없이)우..우와 멋진풍경이네.라는 말을 의무적으로 해댔다. 어릴 때라 그런지 내가 억지로 하는 말들은 내 마음을 지배해 '이렇게 여행을 나오면 행복한 감정을 느껴야 해."가 되었고, 마치 진짜 내가 여행과 나들이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워낙 다니기 좋아하는 아빠의 차를 타고 전국 방방곳곳을 다니는데..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가 정말 내키지 않았으면서. 집에서 혼자 신화오빠들 앨범을 듣거나 친구에게 교환일기 편지를 쓰며 각종 상상에 잠기고 싶었으면서. 방에서 혼자 조용히 나름의 깨알같은 일주일 계획을 세우고 싶었으면서.
성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의무감이 생겨 여행을 다녔다.
싸이월드를, 몇 년 지나서는 카카오스토리와 인스타그램을.. 풍부한 볼거리와 경험으로 장식해서 행복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도장깨기 식으로 여행과 나들이를 다녔다. 그래서인가. 주말이나 방학에 각종 핫플레이스와 여행지를 다녀왔어도 평일 아침에 일어나면 더 몸이 찌뿌둥했다. 마치 시험 직전 휴일에도 공부를 해서, 시험날 피곤한 몸으로 일어난 수험생처럼.
그런데도 SNS에서 받는 그 의미 없는 좋아요의 숫자에 심취해 내가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카카오톡을 제외한 모든 SNS을 끊게 됐는데-
일상에서 SNS가 사라지자 남들에게 내 일상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남들은 내 일상에 관심이 없으며,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나의 직계가족들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크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온전히 내가 바라는 휴식을 취해야겠다 마음먹자 그제야 내가 여행도, 나들이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남편은 여행을 떠나기 전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여행 유튜브를 보며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겁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여겨졌다는 것도.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큰 걱정과 부담을 안고 '무사히 여행을 마쳐야지'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었다는 것도. 여행을 다닐 때도, 다음 일정은 어디지? 이제 카페에서 좀 쉴 수 있지? 그리고 한 군데만 더 가면 숙소에 갈 수 있지? 아.. 집에 돌아갈 때까지 얼마 남았네. 조금만 더 힘내자. 이런 생각을 주로 했던 것도. 그래..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의 여행을 가면.. 집에 돌아가 안정된 일상을 살아갈 날을 은근히 기다렸다는 것도.
이제 완전히 인정했다.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를 측은하고 별종인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들이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무작정 갑자기 떠나는 여행? 사람이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로의 나들이? 정말...최악이다.
대신 나는 실제 물리적으로 떠나는 여행보다 머릿속으로,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 좋다.
혼자 아무런 방해받지 않는 카페에서 조용히 내 생각을 수첩에, 브런치에 끄적이는 것.
그 카페가 집 앞 동네 카페이든 유럽의 어느 멋진 카페이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다. 그냥 여행지의 복잡한 둘레길 대신 내 잔잔한 생각길을 걷는 것 같아 마음이 벅차오른다.
음.. 그렇다면 한 10년쯤 후에 우리 딸이 성인이 되어 더이상 육아를 하지 않게 되면-
아무도 가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로 길게 여행을 가볼까.
우리나라의 시골길도 좋고, 유럽이든 아메리카든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어느 곳이든 괜찮다.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가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 곳으로 훌쩍 떠나와 하염없이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노후계획도 세우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 될 것 같다.
(나에게는 도장깨기처럼 느껴지는) 활기찬 핫플레이스 세계여행이 아닌...
(남들에게는 노잼에 시간 낭비라 측은하게 느껴지는) 나만의 휴식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