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자기계발을 병행하지 말 걸

무리해서 육아와 자기계발을 병행하지 말 걸

by 책하마

확실히 십여년전에 비해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의 삶을 지칭하는 '갓생'이라는 말도 생겼다.

'갓생'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 대학생 시절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이미 나는 자기계발에 진심인 '갓생러'였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성실성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자기계발이었고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넘쳐나던 20대 시절에는 이게 빛을 발했다. 대학생 때에는 각종 소모임, 동아리활동, 스터디모임을 하고 복수전공까지 해냈다. 사회초년생일 때는 퇴근하면 당시 흔치도 않았던 PT를 받으며 몸매관리를 하고 주말엔 대학원을 다니며 꾸역꾸역 석사학위까지 땄다. 방학 때도 온라인 연수가 아니라 굳이 현장 연수를 찾아다니며 공부했고 영어 스터디 모임을 하다가 영어번역과정까지 수강했다. 결혼 직후에는 재테크 스터디를 조금씩 시작했고 부동산과 경매 투자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빠서 때론 지쳤지만 이런 나에 대한 뿌듯함(솔직히 말하면 허영심에 가까운)이 더 컸다.


그러다가 29살에 아기를 가졌다. 임신을 준비하던 터라 정말 기뻤다. 들뜬 마음으로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막연히 생각했다.

'엄마가 돼서도 절대 나태해지지 말자. 육아에도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을거야. 꾸준히 운동하고, 공부하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그땐 왜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 했을까. 육아에 최선을 다하는 그 귀한 시간이 나 자신을 잃는 시간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실제로 그랬다. 수유하는 시간, 아기를 재우는 시간, 기저귀를 갈고 아기가 어지른 것을 치우는 시간, 아기가 혹여라도 잠시 한눈 판 사이 다칠까 봐 전전긍긍 눈으로 쫓던 시간, 내가 잠시라도 딴 일을 하면 응애 우는 아기를 안고 어르던 시간들이 모두, 나만의 시간을 '뻿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육아가 더 힘들어졌다. 일상이 우울해졌다. 급기야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자기계발 1. 꾸준한 운동 & 날씬한 몸매 유지

출산하면 금방 원래 몸무게를 회복할 줄 알았는데 웬걸. 아기 몸무게였던 딱 3kg만 빠졌다. 그래서 산후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무렵인 출산 한 달 뒤부터 아파트 헬스장에서 걷기운동을 시작했다.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아기를 맡기고 하루에 30분씩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모유수유중이었던 터리 아기가 젖을 먹기 전에 얼른 운동해야 했다. 어느 날은 내가 문을 나가기도 전에 내 품을 찾는 아기 때문에 걷기운동을 못 하기도 했다. 그럴 땐 화가 치밀었다. 살쪄서 좀 빼겠다는데 그걸 방해하는 아기도, 그런 아기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는 남편도 다 미웠다.

그렇게 꾸역꾸역 열심히 하던 중 무릎이 너무나 아팠다. 다음날부터는 무릎이 너무 시큰거려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당장 걷기운동을 그만하라고, 출산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기엄마가 뭐하는 짓이냐고 의사선생님께 혼났다. 그렇게 걷기운동을 그만두었다.

산후 6개월즘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필라테스를 등록해 아기를 재우고 열심히 다녔지만 아기는 가끔, 아니 자주 내가 필라테스 센터에 가야 하는 시간에 잠들어있지 않았다. 한번은 아기가 하도 안 자길래 그냥 남편의 품에 맡겨버리고 필라테스 센터에 막무가내로 와버렸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도저히 내가 못 돌보겠다고. 기절할 듯 울어대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땐 그런 식으로 아기도 남편도 너무 자주 미웠다.


# 자기계발 2. 독서, 공부, 재테크

엄마가 되니 20대에 하던 스터디 활동 등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혼자 할 수 있는 독서에 몰두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육아서를 읽고, 복직해서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겠다며 청소년 상담사례 책도 많이 읽었다. 육아휴직이 길어지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지자 제태크 서적들도 읽었다. 사회 이슈에 문외한이 되지 않기 위해 역사, 사회과학 등 교양서적들도 읽었다. 사실 내가 정말 즐기면서 읽는 책들은 에세이와 소설인데 그런 것들은 공부가 안 된다는 오만한 마음에 멀리했다. 읽는 것들은 전부 일종의 자기계발서들이었다.

자기계발서들을 마치 임용고시 준비할 때처럼 공부하듯이, 암기하듯이 읽었다. 그러다 보니 독서가 진정한 힐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제가 됐다. 과제에 열중해야 하는데 아기는 깨어 있는 내내 나를 찾았다. 과제할 시간이 모자라게 하는 이 육아라는 것이 점차 버거워졌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터라 친구들 중에서는 미혼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친구들이 놀러올 때마다 "니네 지금 시간 많을 때 공부도 여행도 많이 해"라는 꼰대같은 말만 지껄이며 세상에서 가장 바쁜 듯 굴었다.

재테크를 위해 부동산 경매 공부를 했다. 부동산 투자를 위해 아이를 남편이나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임장을 다녔다. 하지만 초보였던 나는 한 번의 임장으로 많은 정보를 얻기 어려웠고 추가 임장을 나가야 했다. 그때마다 남편이나 친정 부모님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고,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점점 지쳐갔다. 공부도, 현장 임장도. 아가씨였다면 그냥 나혼자 부지런히 하면 됐을 걸. 내가 하는 일에 적극 지지도 못 받으면서 아쉬운 부탁을 계속 해야 간신히 해야만 하는 이거. 못해먹겠네. 원망만 가득 안고 포기했다.


# 자기계발 3. 영어 공부

아기를 키우며 느꼈던 건, 수유하는 시간이 세상 지루하다는 점이다. 출산 전에는 성모마리아님과 같은 성스러운 표정으로 행복하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수유하는 내내 아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엄마로서의 충만함만을 느낄 줄 알았다. 이는 대단한 착각이었다. 특히 나처럼 이기적이고 미숙한 엄마한테는. 나는 이 수유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아깝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나. 이 시간에 뭐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또 스멀스멀 올라왔다.

수유하는 시간에 영어뉴스를 듣기로 했다. 마침 영어뉴스를 반복해 들려주는 어플이 있었다. 하지만 어플을 켜고 재생하는 과정, 잘 안 들린 부분을 다시 돌려 듣는 과정, 잘 모르겠는 단어를 찾아보는 과정 등이 수유와 병행하기에는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게다가 새벽수유까지 하던 그 시기 영어문장이 다섯 개가 채 나오기도 전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이것도 포기했다. 포기하는 것까진 괜찮은데, 문제는 나같이 성실한 사람들이 뭔가를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포기했을 때 자괴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번 우울해졌다.


그렇게 동동거리며 자기계발과 육아를 반복하다 보니 아이는 유치원생이 됐다.

그리고 나는 서른 다섯 살, 대상포진을 앓았다.


영양소를 고루 갖춰 먹지 않고 살찔까 봐 적게 먹었던 것이 결정타였지만,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맏았던 것도 한몫 했으리라. 대상포진은 운이 나쁘게도 왼쪽 눈으로 왔고 나는 실명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한 번 크게 앓고 나니 날씬한 몸매도, 자기계발도 다 부질없어졌다.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게 중요했다. 그때 거의 처음으로 다짐했다. '스트레스 받지 말자. 학교 일과 육아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그 때부터 충분히 먹고 충분히 쉬었다. 시간이 나면 뭔가 자기계발을 하느라 고군분투하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했다. 잠을 자거나 가볍게 소설, 에세이를 읽으며 좋아하는 커피를 마셨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것, 공백이 있는 삶이란 신세계였다. 그제야 후회했다. 육아만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자기계발이랑 병행하지 말 걸 그랬다고.


이전에는 육아 때문에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을 내 정체성처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자기계발 열심히 하는 나는 20대의 정체성이다. 30대 이후 워킹맘도 내 모습이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조금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왜 자기계발하는 나만 진정한 나라고 생각했을까. 미숙하지만 아이를 돌보고 하염없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다 내 모습인데. 엄마로서의 모습은 이제까지의 모습과 다른, 아니 어찌 보면 한 단계 더 성장한 내 모습인데. 나 자신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성장시키는 또다른 나의 소중한 모습인 걸.


지금 그 아기는 초등학생이 돼서 그때처럼 응애응애 울지도 않고, 엄마를 찾는 시간도 확연히 줄었다. 지난했지만 조금씩 나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우리 딸이 아기였을 때, 24시간 나를 찾던 그 때 그 시간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오롯이 우리 딸만 바라볼 걸. 자기계발은 지금부터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 늘려갈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 딸이 나를 찾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텐데. 너무나 후회가 된다. 하지만 후회만 하기에는 그 시간도 아깝다. 우리 딸이 본격적으로 사춘기가 와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기 전에, 엄마는 안중에도 없는 여드름 난 얼굴로 잘생긴 남학생과 썸탈 궁리를 하기 전에, 아이돌 오빠들이랑 지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지기 전에 우리 딸이랑 많은 시간 함께 빈둥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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