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모티머 J. 애들러)_박우영

독서후기 < 박우영 (기계공학과 석사과정) >

by 독카맨


1부, 2부



기본적으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비평’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본 책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본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론과 그 예시로 드는 저서들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론, 국부론, 순수이성비판 등 아주 수준 높은 고전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정도 수준의 고전에 대해서도 비평이 가능할 만큼 저자의 학식이 높고, 이를 바탕으로 독서법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므로 현재 나의 배경지식 수준으로는 저자를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에 따라 본 독후감에서는 나의 정신을 최대한 저자의 정신에 접속함에 따른 이성적 의견의 일치에 목표를 두고자 하며, 그 방법으로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다시 나의 표현으로 재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저자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키워드로 ‘스스로’, ‘적극적으로’, ‘정신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면 단연 ‘깨달음’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은 남이 제공해 줄 수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데아에 근접한 것으로 언어라는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도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지식이 아닌 ‘스스로’의 ‘정신적 순수이성’을 ‘적극’ 활용하여 도달하여야 한다.


하지만 분명 책은 ‘언어’라는 매체 덩어리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을 구성하는 ‘언어’ 자체부터 풀어 해치고 시작한다. 저자와 독자의 어휘 및 문법이 일치하여 언어에 의한 오해를 없애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저자가 생성한 수많은 문장들을 논리와 배경지식으로 연결하여 저자와 동일한 정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책일수록 어휘의 뜻이 깊고, 문장이 복잡하며, 문장 사이의 연결이 복합적인 것은 그만큼 언어라는 불완전한 매체를 통해 도달해야 하는 순수한 이데아의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불완전하게나마 수많은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리라. 그렇게 긴 길을 걸어 동일한 이데아에 도달한 독자는 그제서야 그 이데아로부터 파생된 다른 언어적 표현을 재생성할 수 있게 되고, 저자와 동일한 위치에서 ‘이성적인’ 동의 또는 반대를 제시할 수 있다. 어찌보면 독자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만큼 본인의 이데아를 치밀하게 언어로써 구현하고 비판받을 준비를 한 저자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책은 저자의 이데아로 안내하는 수많은 이정표 덩어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이정표인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어디인지 스스로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가능한 저자가 명확하게 이정표를 세워주면 좋겠지만 길이 복잡하다면 우리 스스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 책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정표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일 것이다. 책의 종류와 목적에 따라 이정표의 종류가 다양하며, 좋은 책은 이정표끼리의 연결부터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본 책에서 보충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장 자체에는 동의하나 조금의 설명을 추가하고자 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예를 들면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해 이해하겠어’라는 목표를 세우고 독서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면 이 문장에서의 ‘이해’는 부분적인 이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독서의 본질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로마 역사라는 파편만 이해하고자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깨달음의 한 조각으로써, 유익함(정신적으로 성숙하려는)이라는 큰 목적을 위해 그 책을 이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본질적인 목적일 것이다.


질문: 본 책에서는 책을 읽는 다양한 방법들을 ‘열거’하였는데, 그 방법들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나 목적이 있다면?





3부, 4부


3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책에 대한 독서법을 제시한다. 실용서의 경우 원칙을 제시하여 저자가 독자가 무언가를 하도록 유도한다. 독자는 본인의 목적이나 목표를 기준으로 책의 목적과 그 수단을 평가한다.


문학작품의 경우 ‘진’을 찾으려 하지 말고, 책 자체가 우리에게 자연스레 불러일으키는 ‘미’를 음미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본디 이성과 감성을 동요시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여 정신을 치유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온전한 영향을 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카타르시스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카타르시스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의 흐름으로부터 흘러나오므로 최대한 이야기의 흐름을 인정하고 스며들어 작가의 감정과 상상력이 담긴 내면세계로 빠져들어야 한다. 작가가 생성한 내면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여야 해당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겪는 시련과 이를 극복하는 용기를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정의, 신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단순히 빠졌다 나오는 것을 넘어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본인의 어휘로 다시 설명하고 줄거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해당 문학작품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소설, 희곡, 시의 경우 세부적으론 차이가 있으나 결국 무엇에 관한 글인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글은 맞는 이야기인지를 본다. 역사책의 경우 역사라는 사실을 역사가의 관점으로 해석한 단편적 진실로 바라보게 되며, 본인의 관점으로 이를 판단해야 한다. 시사 사건 보도의 경우도 비슷하게 사건이라는 사실은 기자의 단편적 진실로 전달된다. 요약판 또한 원본을 편집인의 단편적 진실로 전달된다.


철학책의 경우 어떤 순수한 질문에 대해 이해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해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과학이 특정 조건의 단편적 사실만 다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경험만으로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하며 훌륭한 철학자는 모두가 이해 가능한 깊은 사고 흐름을 거쳐 현상의 궁극적 원인과 조건을 답으로 제시한다. 결국, 철학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질문 그 자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본 책은 신학책, 사회과학책에 대한 독서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다양한 독서법들의 공통 원리는 결국 저자의 내면세계라는 이데아에 접속하여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비언어적인, 단편적인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저자는 본인이 공유하고자 하는 이데아의 이정표로 불완전한 언어와 문장을 사용하며, 그 이정표의 구성은 책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므로 우리는 불완전하고 다양한 이정표 구성을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이데아는 저자와 나 둘만이 합의한 단편적 진실이다. 우리는 다양한 책을 읽으며 다양한 산봉우리에 올라봐야 한다. 이미 어렵고 좋은 책을 읽어 높은 산봉우리에 올랐다면 굳이 그 아래의 산봉우리에 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산봉우리의 경치는 단편적인 것으로 다른 높은 산봉우리의 경치 또한 통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보통 한 권의 책이 제시하는 진실은 단편적이라 진실 전체를 보기 위해선 다양한 책이 제공하는 다각도의 경치를 볼 필요가 있다. 이때 비슷한 위치의 산봉우리만 오를 것이 아닌 반대편 봉우리도 공평하게 올라가 어느 한 봉우리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더욱 진실에 가까운 이데아는 여러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는 길, ‘서로 다른 답을 정돈한 내용’에 있으며 그 길은 기존 저자의 이정표가 아닌 나 자신의 이정표를 세워 정리하여야 한다. 기존 책의 언어만을 사용하면 결국 그 책의 산봉우리에만 도달하기 때문에 각각의 산봉우리를 넘나들 수 있는 나만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질문: 통합적 읽기를 통해 단편적 진실들을 엮어 궁극적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실존주의 철학: '실존의 향기'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