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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naim Lee May 14. 2022

안정과 불안 사이에서

20220420

1

지난주 딥하우스 클럽에서 흘러나오던 비트가 생각난다 보통 이디엠은 좀 더 단순하게 쪼개지고 힙합은 그루브인데 정글 비트에 춤추는 건 고난도다


2

열두 시면 우리는 신데렐라처럼 무도회장에서 떠나가야 했다 밤새 춤추고 싶다고 빌었다 춤은 나의 유일한 기쁨


3

남미음악에 춤추고 싶었지만 그런 곳은 없다 이전에는 스타 펍이 있었지만 코로나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높이 십층 가까이 되는 쇼윈도 매장이 지어졌다 이태원 거리에는 남아있는 펍들과 새로 바뀐 술집들과 새로운 콘셉트로 단장한 펍들이 즐비하다 주말이면 몇십 명씩 줄 서있는 가게들 나는 언제나 지나치며 분위기에 취한다


4

전에 우연히 만난 여성이 쌍욕을 좍좍 내뱉는 거 보면서 반면교사했다 시원하자고 뱉은 욕설이 나를 더럽힐 수 있구나 욕은 대본으로만 하자고 그렇지만 잘만하면 섹시하기만 한데 담배처럼


5

스물다섯 나는 늘 스물다섯에 머물러 있다 누나는 왜 그대로야 식상한 질문은 나를 변명하는 대답으로 이어지고 나는 서서히 늙어가는 병에 걸렸다 그것은 내가 가진 병명 중에 가장 그럴싸한 생의 변명


6

가끔 가치 없는 것에 끌리기도 해

예를 들면 반짝이는 스티커

다이어리나 일기장을 꾸미려고 잔뜩 사놓고

끈적임이 떨어지면 떼어버리면 그만일 존재들


7

우중충한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극적이기 위해 과장은 할 수 있지만 과도한 과거는 축소할 수 있을까 축적된 데이터들을 기만하며


8

누워서 가만히 있질 못한다 쉬는 것도 노는 것도 누워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귀를 혹사시키든 눈을 혹사시키든 그렇지만 결국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가야 한다 머리를 혹사시키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고 나는 나를 괴롭히며 성장한다


9

식욕과 성욕은 비례인가 반비례인가


10

여행은 가고 싶고 잔고는 점점 줄어들고 내 숨통을 쥐고 뒤흔드는 사람들 나는 열정을 버리며 권태를 배운다


11

지난밤 꿈속에서 나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을 해체하면서 그곳에는 친구도 연인도 관계의 경계가 없었으며 신앙도 자유도 구속도 없었다 온전히 무, 밤의 세계였다


12

안정과 불안 사이를 창녀처럼 떠돌고 있다 그 누구의 품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고 그 누구의 마음도 나와는 같지 않구나 울다가 웃으며 나를 시기하는 너를 경멸하고 나를 비난하는 너를 지워내며 우리는 그 어떤 존재와도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고독해지고


13

시간을 살해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문을 열고

하우스로 들어가세요 비트를 뒤집어쓰고 반복되는 날을 집어 드세요 찌르세요 공허를 무찌르세요 근심을 하품으로 안길 때

피로한가요 필요한가요 피로 물든 어제를 팬티처럼 벗어던지고


14

나를 사랑한다는 너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사랑하는 만큼 손가락을 잘라보라고 했다 너는 열 손가락으로 다발을 만들에 내게 전했다 나는 그제야 나의 발가락을 잘라 너에게 수프를 끓여주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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