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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내 Nov 10. 2024

서울여자, 똑 부러지는, 호기심 많은

<월간 오글오글:11월호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입니다.




서울여자


이제야 정말 서울여자가 되었다. 서울에서 산지도 만 20년이 넘었으니 고등시절까지 보낸 내 고향은 추억 속에 잠긴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순도 100% 전라도 소녀.. 시골아이였다.


방학이 되면 서울에 살던 친척오빠들이 놀러 왔었는데 오빠들은 친구들에게 시골에 간다고 말했다고 했다.

"오빠 여기 남원시야! 여기는 시내인데 왜 자꾸 시골이래"

"야 여기가 시골이지 서울 아니면 다 시골이야"

(뭐래? 얼굴도 나보다 까맣고 더 촌스럽게 생겨서) 혼자 속으로 키득키득 웃음이 났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신학기를 보내고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질 무렵  늘 나는 "너 혹시 서울에서 전학 왔어?"라는 말을 들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얼굴도 하얗고 사투리도 안 써서라고 했다(정확히는 사투리 억양일 것이다)그리고  차가운 이미지라 처음에 친해지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도 세트로 듣곤 했다


그때부터 내 이미지가 말을 안 하면 차갑다는 걸 알고 늘 미소 지은(위스키~) 표정과 먼저 인사하는 게 습관이 베어버렸다. 훗날 이 습관 때문에 서울 생활하면서 남몰래 상처받았다는 웃픈 사실






똑 부러지는


#지금부터는 오글글의 예고편입니다. 주의요망!


초등학교 시절 6년 동안 3월 학급반장을 역임했다. 한 반에 4-50명 되는 학급에서 3월 반장을 했다는 건 첫인상이 거의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학급반장을 추천해 보라는 선생님의 말과 함께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며 친구들을 추천했고 내 이름도 항상 있었다. 그러면 공약을 앞에서 발표하는데 별것도 없는 공약이었지만 아이들은 나에게 많은 표를 던저주었다. 내가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게 똑 부러져 보인다고 했다.




취업난이 심각했던 대학교 4학년 때 CJ공채를 넣은 적이 있다. 라는.. CJ 하면 복지가 좋아서 들어가고 싶은 대기업 중 한 곳이었다. 1차 서류면접은 합격했고, 2차 면접도 통과 후 임원면접이 남아있었다. 면접 족보 비스무리한걸 읽으면서도 덜덜 떨려서 면접 한 시간 전에 알람을 맞춰두고 준비해 온 청심환 한알을 지하철역에서 털어 넣었다. 심환효과가 전혀 없는 건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고 머리가 하얘져서 창백해져가고 있을 때쯤 내 이름이 불러지고 10명이 한 팀이 되어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히려 앞에 사람들이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탁 드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던저진 질문을 떨지도 않고 알맞은 미소와 말투로 대답하였고 면접장을 나온 나는 더 이상의 아쉬움도 없었다. 운이 좋게 공채에 합격했고, 날 나와 같은 조로 들어갔던 동기들이 내가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면접관들이 웃기도 하고 분위기가 좋아져서 우리 조에서 많이 붙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너 어쩜 말을 그렇게 똑 부러지게 잘하냐"라고 했다



현재는? 경단녀에 주 대화자가 애들이다 보니 말도 녹이 슨다는 걸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요즘은 말이 하기 싫다.. 





호기심 많은



웅변, 가야금, 피아노, 발레, 태권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뭘 하나 배우면 진득하니 한 적이 없던 나다. 조금 익숙해지면 또 새로운 거에 관심이 가곤 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초반에 재밌어서 밥상에서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보고 동생은 엄마를 졸라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바이엘 3권에서 끝났던 나의 피아노 이력과는 달리 동생은 체르니 30- 모차르트-체르니 40- 베토벤까지 넘어가며 온갖 콩쿠르를 휩쓸고 다녔다. 집안 사정상 피아노를 그만뒀지만 동생은 전혀 미련이 없어 보였다. (공부도 전교 1등 하는 아이였다)



이것저것 직접 배워본 탓에 정말이지 기본기만 익힌 수준에 머물렀다. 나의 이런 습관은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이어졌다. 남자친구와 100일을 넘겨보는 게 손에 꼽힐 정도였다. 비싼 선물을 해줬다는 이유로, 너무 잘해준다는 이유로 정말 웃긴 이유들로 한번 아니면 절대 아닌 나는 쿨하게 헤어졌다. 싫증이 났던 건 아니었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꽤 오랜 기간을 혼자 힘들어한 시간들도 있었기에.. 이런저런 호기심으로 전성기 때(?) 정말 많은 소개팅이 들어왔고 그걸 다 소화했지만 그 남자가 그 남자다!!

반면 동생은 한번 만난 사람과는 기본이 6년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옆에서 보는 나는 정말 질색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게 있으면 새롭게 도전하는 걸 좋아하고 운이 좋게도 작은 성과들도 이뤄낸다. 인스타를 시작했을 때 배운 릴스도 그랬고, 브런치 작가도 그랬다. 뒷심이 부족함을 느낀다. 이런 나에게 남편은 늘 절박함이 없어서 그렇다며 팩폭을 하지만 나는 그냥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많아서 잘된 일도 많고, 호기심이 과해서 현재 소송 중에 있는 일도 있다. 이 내막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글로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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