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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9. 2024

휘파람, 홍록기, 무사

<월간 오글오글 : 11월호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입니다.




<휘파람>


'나 어제 휘파람 연습하는 사람 인스타 보고 너 생각했잖아.'

'휘파람?'

'너 무슨 연극 오디션 볼 때 장기자랑으로 휘파람 분다고 교실에서 계속 연습했었음.'


아 그랬다. 휘파람을 열심히 불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연극반 오디션이었나 보다. 장기자랑으로 하품을 해도 붙었을 소수 인원이 왔더랬다. 노래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했고 휘파람은 몇 번 연습하면 그럴싸하게 휘휘 거릴 수 있어 그렇게 교실을 시끄럽게 만들며 연습을 했었다.


그 후에도 휘휘 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린 적이 있다. 중3, 연기학원 오디션에서. 안양예고를 가기 위해 찾아본 곳이었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휘파람이 장기라고 하니 북한 노래 휘파람을 휘파람으로 불어보란다. 뭐 이런 창의적이지 않은 선곡이라니. 그래서 휘파람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박수. 잘한다고 칭찬해 줬다. 오디션만 보고 학원은 가지 않았다. 안양예고도 안 갔다. 못 간 건가?


연극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동아리에서도 열정을 불살랐다. 보조출연알바를 하다가 기회가 닿아 영화 오디션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연극판에서 월 20만 원을 벌며 꿈을 좇아 살고 싶지 않았다. 꿈도 현실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연극을 하다 말았다. 휘파람 같은 정도.


내 삶이 휘파람 같다고 생각했다. 노래와 흐밍사이의 휘파람. 가사는 없고 그래도 뭔가 부르고 싶으니 가락이라도 내뿜어 보는 것 말이다.


'어떤 사람'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잘하는 사람, 좋은 사람, 멋진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 늘 불안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계속 뒤돌아봤다. 왜 이렇게 밖에 못 사는지 내가 나를 용납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노래라면 나는 휘파람 같았다. 대충 흉내만 내는, 가사는 없는.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어딘가에 기웃 거리는 내가 우스웠다.


그러다 휘파람을 불 줄 아는 나와 다른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휘파람을 무시하는 나에게 보란 듯이 휘파람을 휘휘 불었다.


그가 말했다.


꼭 노래를 해야 하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목적이 있는 삶이 중요한 건가.

휘파람을 불 수 있으면 불면되고 그게 소리이고 가락이면 되는 것을. 왜 그 자체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 건가.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완전한 것은 노래이고, 온전한 삶은 행복이었다. 휘파람처럼 사는 그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내 덫을, 울타리를,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휘파람은 휘파람인 거다.


정해진 가사에 따라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휘파람도 연습을 해야 한다. 목이 굳어버리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힘을 풀고 소리를 내어본다. 휘휘.

장기라고 내세울 곳도 더 이상 없지만 모르는 노래도 따라 부르고 싶을 땐 휘파람을 분다.

완벽하지 않아도 완성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소리를 위해.



<홍록기>


나는 록기였다. 영어선생님은 나를 록기라고 불렀다. 록기야 인사하자. 록기야 본문 읽어봐라. 록기야 오늘 진도는 어디부터니. 야자시간에 홍록기를 보러 뛰쳐나간 후로 교무실의 유명인사인 나의 별명은 록기가 되었다.


홍록기


나의 첫사랑이자 우상. 정신적 지주.


어느 날 꿈에서 홍록기와 왈츠를 췄다. 왈츠는 체육 수행평가 과제였다. 물난리가 많이 나는 우리나라 태극기의 태극문양을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꾸자 그럼 국기 이름은 뭘까 홍록기. 이런 우스개 소리를 전 날 들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짬뽕이 되어 홍록기가 꿈에 나온 거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엄마에게 외쳤다.


 '나는 오늘부터 홍록기 팬이야'


사인회를 갔고, 틴틴파이브 콘서트에 갔다. 삐삐에 안부인사를 남겼고 공항에 오는 그를 마중 나갔다. 때때로 편지를 쓰고 겨울엔 그를 위한 목도리를 만들었다.  


그는 사인회에서 알짱거리던 여자애를 보고 웃어줬고, 가난한 중학생에게 이후 모든 공연의 초대권을 줬다. 삐삐 녹음이 가득 차 있을 땐 바쁜 와중에도 음성 사서함을 지웠고, 공항에서 돌아갈 차편에 없는 땡땡이 고딩의 학원까지 자신을 마중 나온 차로 데려다줬다. 얼기설기 올이 빠진 목도리를 친구에게 자랑했다. 내 팬이 해준 거야 멋지지.


휘파람과 함께한 오디션을 보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연극 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연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공부는 때가 있다고. 그러고 그는 수학의 정석에 사인을 해줬다.


그와 같은 생일이었던, 그와 10살 차이였던 남자를 만났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이 아니라 단명을 할 만남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내게 히어로였다.


티비에서의 그와 실제의 그는 달랐다. 그는 진중하고 배려심 있고 따뜻하고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꿈에서 본 그는 실제에 가까웠다. 그래서 신기했고 더 빠져들었다. 부침이 있는 삶을 사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삶이 참 파도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렇네 파도 같아.  


24년 전 11월, 이맘때였다. 빼빼로를 사고 싶었으나 품절인 바람에 비슷하게 생긴 과자 통크를 사서 포장을 해서 사인회에 갔었다. 롯데 백화점 5층 엘리베이터 옆에서 그를 처음 봤던 날을 기억한다.

환하게 웃으며 '너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던 그날.


그날부터 나는 록기가 되었다.


힘든 시절에 나는 록기였다. 그래서 버티고 견뎌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이름 록기.


call me by his name.



 

<무사(無事)>


'무사'는 '오늘도, 무사'라는 요조의 책을 보고 꽤나 멋지다고 생각한 단어다.


무사 : 아무런 일이 없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하다.


어렸을 땐 무사한 하루를 보내며 지루해했다. 무언가 빵 터지는 재미는 사건이 있기를 바랐다. 지겨운 학교에 가고, 고단한 학교를 다니는 게 그저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겨운 학교와 고단한 학교를 다니는 주어가 달라졌으나 어쨌든 종 치는 대로 생활하는 삶이 식상해졌다. 이렇게 졸업을 몇 번이나 해야 내 삶도 끝나는 걸까. 하며 하루하루 한숨지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생각이었다. 지겹고 고단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무사한 나날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잃을 것도 없고 책임질 것도 없었기에 권태로울 수 있었던 거다. 아니, 잃어보지 않아서 지겨운 나날이라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이 생기니 무사한 하루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세상의 혼란한 일들이 다 내 일 같아졌다.


한 살짜리 아이가 전쟁으로 뇌성마비 주사를 못 맞아, 이제 거의 사라진 소아마비가 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이 났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일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티비 속 교통사고 소식과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반려자,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친구들이 무사하지 않은 소식들이 마음을 콕콕 찔렀다.


무사한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사람이 적은 곳에서도

일하면서도 놀면서도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강에서도

집에서도 길에서도


무사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사건이 안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만은 무사하면 좋겠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닿지 않는 곳의 저 멀리 있는 사람들도 함께 무사하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건 그래서 좋아하는 건 '무사'이다.




-에필로그-


휘파람을 잘 부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결혼식 사회 볼 사람은 따로 있어.

휘파람 남자가 말했다. 그런 게 미리 정해져 있었어?

홍록기는 휘파람을 잘 부는 남자와 록기라 불렸던 여자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봤고

그들의 무사한 나날을 기원했다.




나와 휘파람 남자 그리고 홍록기,

그리고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모두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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