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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혜정 Nov 10. 2024

매일 취해 살아도 되나요?

<월간 오글오글: 11월호 나를 표현하는 단어 세 가지>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단어 세 가지'입니다.






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

그래 그만 세자. 안 마신 날을 세는 것이 빠르겠다.



애주가. 의학 용어로는 알코올의존증이라고 하지만 나의 이미지를 상당히 반감시키는 것 같아 애주가라고 해두자. 아니, *반주가라 하고 싶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작당(?)하고 술을 마셨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 대한 사춘기 반항정신 때문이었다. 술맛도 모르고 마셨다. (*반주 : 밥을 먹을 때 곁들여서 마시는 술)



그러다 반주의 맛을 알아 버린 건 대학시절.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서로의 날라리 내공을 알아본 K양과 입학 때부터 절친이 됐는데 죽이 착착 맞았다.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 사이 점심을 먹으러 가면 수제비든, 돼지국밥이든, 볶음밥이든 상관 않고 소주부터 시켰다. 달큰하게 취해 오후 수업을 들으면 얼마나 집중이 잘 되던지.



훗날 K양과는 둘도 없는 소울 메이트가 되어, '니체가, 롤스가, 장자가~'하며 수준 높은 티키타카와 진지한 비평 사이를 오가며 밤새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교사가 되어 함께 떠난 일본 여행에선 말간 대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2차 3차 오사카의 어느 술집을 헤매다 술이 모자라 편의점 매대를 쓸어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교육에 관한 진지한 토론을 했다. 밤새.



내 인생의 많은 사건사고, 아니 추억들은 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술에 취해도 소크라테스니 공자니 했던 것은, 술만큼 취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배움이다. (배움? 배움이라고? 설마 그 배움? 네, 맞습니다. 그 배움입니다. 저는 공부를 참 좋아합니다.) 아마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배움의 참 맛을 안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상술했듯 술 마시느라 바빴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도 2년은 정신 못 차리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이번엔 전 남친(현 신랑)과. 물론 놀고는 있었지만 대외적 신분은 '고시생'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경제는 불황이었고,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던 때였다. '고시생'이 마치 하나의 직업이라도 되는 듯, 남들에게 고시생이라고 말하면 이유 모를 신뢰와 응원이 샘솟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면서도 괜히 전공서적을 펼쳐 보곤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 전공은 철학(도덕윤리)이었다!



생각 없이, 정확히는 임용고시에 대한 기대 없이 철학을 공부하니 참으로 경이로웠다. 인간 존재와 사회, 국가, 세계, 우주까지. '한 인간의 사유가 깊어지면, 세계의 원리를 창조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움에 취해있던 무렵, (내가 너무 자주 얘기해서 지인들은 지겨워하는) 그 남자를 만났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마성의 남자, 니체.



“다시 태어나도 나이길 원하는가? 지금의 삶이 무한이 반복되어도, 좋아!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가?”



니체의 책을 읽다가 위 문장에 완전히 꽂혔다. 벼락을 맞은 듯 굳은 목덜미를 붙잡고 내 삶을 돌아봤다. 아악! 절대, 절대 반복하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내 삶이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아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는 삶을 살겠다고. 그리고 그해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니체의 문장은 나의 인생 경구가 되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나에게 배움은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그래서 배움은 즐겁다. 오늘보다 성장한 나, 오늘보다 멋진 내일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배움에 취하고 중독된 사람이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참의미를 알아 버린 나는,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협동학습 연구회, 회복적 생활교육 연구회, 비폭력대화 모임, 전국도덕교사모임, 전교조 같은 교육 관련 모임부터 각양각색의 연수, 자기 계발 모임,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심지어 스노보드 동호회, 채식인 모임 같은 취향 공동체까지. 집은 왜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집 밖을 떠돌며 배움을 일삼(?)았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라기보다, 어딜 가나 참지 못하고 앞에 나서는 성격 덕에 운영자의 직책을 맡아 '집은 왜 존재하는가'를 되뇌는 날을 보냈다.



왜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르쳐 주고 싶은 사람, 위로해 주고 싶은 사람, 그저 좋은 사람... 나와 결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했다. 수업 이야기를 하면 고리타분해질까 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진지충이라고 타박할까 봐, 취미 이야기를 하면 공감하는 사람이 없을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이 사람들만큼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 줬다. 아니, 내 이야기를 듣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덕분에 많이 배우고, 넘치는 성장을 했다.



그들과의 대화, 응원 덕에 어딜 가나 수업 이야기, 세상 이야기, 취미 이야기 같은 진짜 내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됐다. 사람들 덕분이다. 내가 가진 것의 팔 할은, 내가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 줬다. 나도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혼자 간직하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돕는 사람.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에 취해있다. 정확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취해있다.







때론 왜 이리 무언가에 취해 사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취기가 있을 땐 모르나, 취기가 사라질 때 오는 좌절감이랄까? 어떤 허전함이 있다. 술에 빠져 있다가 깼을 때, 한참 배우고 성장하다가 멈췄을 때, 사람 관계에 지칠 때. 큰 상실감이 든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엔 헤어 나오기 힘든 중독성이 있다.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큰소리쳐놓곤 오늘 저녁은 어떤 메뉴로 한 잔 꺾을지 흐뭇한 상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들과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울고 웃을 때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과 어울려 성장하고, 뜨끈한 김치찜에 소주 한잔 기울이며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본다. 살짝 취기가 오르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곳이 된다.



"크으~! 조오타!"



매일 취한 채로 살고 싶다. 세상 모든 것에.





사실 지금 도 조.금 취햇 씀 ㄴ.ㅣ ㄷ 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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