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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혜정 Nov 11. 2024

아이엠 그라운드 지금부터 시작

<월간 오글오글: 11월호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입니다. 아래 글은 오글오글 멤버 한라봉님 글입니다. 






"언니는 힘들면 어떻게 해요?"



나는 설거지를 잠시 멈추고 수현이를 돌아봤다. 수현이가 튀김기 청소를 멈추고 멋쩍게 나를 바라봤다. 새벽 1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각. 우리는 맥주 가게의 2시 마감을 목표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했다.



"힘들어? 마음이? 몸이?"

"아.. 질문이 좀 애매하죠? 이걸 어떻게 얘길 하지? 저 지금 그냥 막 울고 싶어요."



나는 수현이의 답에 무슨 일인지 묻지 않기로 했다.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기보다 감정부터 이야기한다는 건 공감과 위로가 더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멋쩍게 바라본다라고 느꼈던 그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이 슬펐다. 



"나는 그럴 땐 그냥 견뎌. 그 시간이 영원할 건 아니니까 힘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견디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가있더라."



내 대답에 수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튀김기 청소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수현이가 이런저런 일들을 하나둘씩 쏟아내었다. 홀에는 한 팀의 손님이 남아 있었다. 4명의 남녀는 중국어로 신나게 대화 중이었다. 마감 2시까지 꽉 채우고 일어날 분위기다. 오늘 집에 일찍 가기는 글렀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한 번 쉬고 좁은 주방에서 수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책임감이 강한 수현이는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와 띠동갑인 서른 초반의 그녀는 야무지고 똑부러지고 사리분별 잘하는 한 마디로 무슨 일을 맡기든 잘 해낼 인재였다. 10년의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생계를 위해 급히 뛰어든 이 맥주 가게 주방 일도 사장님의 인정을 받아 두세 달 만에 매니저가 되고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 강인해 보이는 그녀는 사실 섬세하고 생각이 많으며 스트레스에 취약해 자주 체하고는 했다.  



조금은 내려놓는 게 좋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잘해왔고 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해낼 터였다. 나는 수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로 놀라고 때론 화를 내며 공감하고 위로했다. 



"여기서 언니만 청정구역이에요."



작은 맥주 가게이지만 이 동네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곳이다. 직원과 아르바이트생만 7명이다. 나와 수현이를 제외하고 다들 20대다. 심지어 사장님도 20대다. 젊은 혈기에 서로 간에 이런저런 일이나 오해가 생기기 쉽다. 수현이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중간에서 입장이 곤란하고 힘들어했다. 



청정구역.



내가 청정구역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직접 그 상황에 발을 들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당사자들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묻지도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전체 분위기를 위해 표정이 어두운 사람에게 조심히 다가가 아무렇지 않게 중간중간 스몰 토크를 던지며 챙길 뿐이다. 



"언니가 있어서 든든해요. 근데 사장님도 이 얘기했었어요. 혜미 누님이 있어서 든든하다고요."



이야기를 끝낸 수현이는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결국 새벽 2시를 넘겨 마감했지만 우리는 밝은 얼굴로 오늘도 고생 많았다며 서로를 다독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현이의 말이 떠올랐다.



청정구역, 든든하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문득 민무늬 토기가 떠올랐다. 무늬가 없는 그릇. 



나는 어느 자리에 데려다 놓든 누구와 있든 모나지도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쓸모가 생기면 제 몫은 해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이다. 



'민무늬 토기'같은 사람. 꽤 마음에 드는 수식어다.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딸아이의 방에 살며시 들어갔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에서 아기 때 잠든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불 밖에 나와있는 손발은 이제 나보다 크지만 아기 때 형상 그대로라 여전히 귀여웠다. 아이 볼을 쓰다듬고 흐트러진 머리도 정리해 주자 아이가 뒤척였다.



"사랑해."



속삭이듯 말하자 아이가 잠결에 웅얼거리며 답했다.



"나도."



아이의 말랑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언제 벗어던져놓았는지 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수면 양말을 찾아서 발에 신겨주자 아이가 신기기 편하도록 발레리나처럼 발끝을 오므리고 발등을 펴주었다. 그 모습도 귀여워 발을 쓰다듬고 쿡쿡 웃었다. 주는 사랑을 귀엽게 받을 줄 아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딸아이의 방에서 나와 주방을 둘러보니 전기밥솥에 보온 전원이 켜져 있다. 밥솥을 열어보니 손도 안 댄 새로 지어놓은 밥이다. 그 밥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평소 무뚝뚝한 아들 녀석은 이렇게 조용하고 섬세하게 상대를 살피고 챙긴다. 운동을 다녀와서 저녁 9시가 넘어 혼자 늦은 저녁을 챙겨 먹는 아들은 밥솥의 밥을 다 먹게 되면 밥을 새로 해놓는다. 늦게까지 일하고 온 엄마가 먹을 밥이 없을까 봐.



"엄마, 왜 라면을 먹어. 그리고 이거 아까 우리가 먹다가 남긴 거네. 이거 먹지 마. 제대로 먹어. 내가 시켜줄게."



퇴근 후 바로 알바를 하러 가는 날이면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집에 와서 간단히 컵라면이라도 먹으려고 전기 포트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는 방에서 나와 식탁을 살펴보고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아이는 전기 포트 물이 끓으면 가져와서 컵라면에 부어주었다. 나는 그 잔소리도 부어주는 물도 참 좋았다. 



"야, 음식 버리면 안 돼.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라면이 제일 맛있드라. 오늘은 라면 각이야."



지오디 노래 중에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가사가 있다. 그 노래 가사 참 구질구질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 있었다. 좋은 거, 맛있는 거 내 자식 먼저, 내 자식 한 입 더. 그게 좋고 행복하다. 헌데 아이는 그걸 또 다 알아준다. 내 컵라면에 물을 부어주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엄마도 먹어 한 마디 해주고 내 밥 위에 고기 한 점 얹어주고 바닥에 누워 잠이 들면 베개와 이불을 챙겨준다. 



나는 '엄마'라서 행복하다.






다음날은 조금 늦게까지 잤다. 알바를 끝내고 와서 새벽 3시 무렵 잠이 들면 다음날에는 7시를 넘겨 눈을 뜬다. 핸드폰을 들어 둘째 딸에게 부랴부랴 전화를 했다.



"윤아야, 오늘은 어땠어?"



지난여름 방학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윤아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6시 수영 강습 후 등교를 한다. 중학교 2학년 아이가 이렇게까지 할 땐 국가 대표를 목표로 하느냐?



"오늘 쌤이 나보고 집에 갈 때 킥판 들고 가래. 책가방에 넣어가면 딱 맞을 거래. 맨날 나만 갈궈."



4개월째 물이 무서워 킥판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윤아의 한탄에는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성인들만 있는 강습 시간에 중2 학생이 새벽부터 일어나 매일 출석하고 있으니 수영장의 귀염둥이다. 



"윤아야, 이제 킥판을 놓을 때도 됐지 않아?"



잘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성장의 기쁨을 느껴보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을 가장한 욕심이 살짝 올라왔다. 



"괜찮아. 언젠가는 하겠지."



윤아는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밝게 대답했다. 아이는 잘하든 못하든 정말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즐거움에서 나오는 그 열정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수다로 가득한 딸과의 등교 랜선 배웅을 끝내고 나면 아들과는 살짝 무미건조한 아침 시간을 보낸다. 까치집을 짓고 나오는 아이에게.



"잘 잤어?"



이 한 마디에 최대한의 애정을 끌어모아 예쁘고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춘기 아들은 지나친 애정과 관심을 꺼려한다. 아이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한발 물러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걸 아이는 좋아하는듯하다. 



"어"



저 무뚝뚝한 한 마디조차 든든하게 들린다니. 나는 아이들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씐 엄마임이 분명하다. 아이가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일기장을 꺼냈다. 날짜를 쓰고 그 아래 가장 첫 번째 줄에 매일 기도하듯 쓰는 문구를 오늘도 정성스레 적었다. 



'주도적이고 생산적이며 성장하는 삶'



내 시간과 삶의 지향점이다. 40년 넘게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 그늘 아래 적당히 벌어먹고 살았고 결혼 후에는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존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소비만 하는 삶을 살았다. 그 시절 타인이 보는 내 이미지는 부잣집 외동딸, 온실 속 화초였다. 



"윤아 엄마도 이런 데서 장을 봐요?"



윤아 친구 엄마들과 재래시장을 갔을 때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을 정도니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시간들이다. 이혼 후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 내 삶을 돌아보니 나는 의존적이고 소비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계획표를 쓰기 시작한 글이 일기가 되었고, 그 일기 첫머리에 다짐하듯 매일 같은 문장을 써넣었다. 



신기하게도 일기를 쓴 후 1년쯤 지나 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이 문장을 적어 넣을 때만 해도 조급하고 간절했다면 이제는 확신이 있고 나를 믿는다. 가볍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기를 써 내려간다.



"잘 다녀와."



큰아이 배웅을 끝내고 출근 준비를 위해 수건을 챙겨서 욕실로 뛰어들어간다. 매일 같은 하루의 반복이고 전쟁을 치르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것 또한 즐겁다. 



오늘은 햇빛이 좋아서 특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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