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몇 가지나 될까. 직업으로 치면 수만 가지가 될 것이고 반려자를 찾는다면 수백, 수천만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내리는 가와 관계없이 가까이서 관찰했을 때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일어나서 밥을 먹고 씻고 할 일을 하고 잠든다. 삶의 즐거움도 취미 생활을 즐기고, 맛있는 식사를 차려 먹거나 외식을 하고, 잘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돈과 시간이 많으면 즐길 거리가 다양해지기야 하겠지만 우리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기껏해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이다. 멋지고 만족스럽고 짜릿하기만 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고, 반면에 만성적으로 권태롭거나 괴롭기만 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질문은 이미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뻔히 보이는데 고통 많은 삶을 구태여 끝까지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는 이미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잘 따라가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때는 나에게도 그런 길을 걷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했다. 경쟁에서 이길 자신도 있었고 성공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원했으며, 이를 손에 넣기 위해 크고 작은 도전에서 성과를 내는 경험도 했다. 때로는 숨을 돌리기 위해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따뜻한 나라의 해안가에서 한가롭게 음료수를 홀짝여봤고, 그 순간을 깊이 음미하려고 노력도 해봤다. 그러나 남들이 이상적이라고 하는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느낀 모든 것은 찰나였고, 잠깐의 만족이 지나가면 쉽사리 다시 권태와 고통에 자리를 내어줬다.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긴 삶을 살려면 현재보다 더욱더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런 이상적인 삶은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내가 원했던 만족스러운 삶은 허상과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 독서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이 책 속의 주인공이나 조력자들처럼 교양 있고 배울 점 있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현실에서 보이는 어리석고 감정 조절을 할 줄 모르며 이기적인 인간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훌륭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일원이 되면 무슨 일을 어디에서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상상 속에 그린 그런 이상적인 집단은 언제나 미래로, 미래로 옮겨졌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새로운 곳에 소속되어도 늘 사람들의 면면은 비슷하고 실망스러웠다. 사실 사람들에게서 찾은 실망스러운 면은 모두 내 안에 있는 나의 부족한 면모와 닮아있었다. 내가 완벽함에서 거리가 멀듯이 모든 면에서 괜찮거나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나와 조금 더 잘 통하거나 덜 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설령 모든 면에서 우러러볼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런 사람들만 주변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제국의 황제였지만 그의 명상록에는 계산적인 사람, 악한 사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적혀있다. 황제라고 해서 주변에 본인이 두고 싶은 사람만 둘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평범한 인물인 내가 훌륭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에 속할 일은 더더욱 없다. 사회적 성공을 이루더라도 내가 원하는 교양 있는 인물들로 둘러싸인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내가 목표로 하던 고통의 끝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라는 게 살아갈수록 점점 명확해지자, 열심히 참으며 살아갈 동력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삶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낼 수는 없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삶에 대해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소비하고 여행을 다니는 등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해답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이나 심리학, 명상으로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고전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고민한 현자들은 많았고 어렸을 때도 이런 책을 읽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에는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 산다는 건 늘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현자들이 이야기하는 인생의 무상함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싫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생은 진실로 공(空)한 것이었고 내가 평생 쫓아다녔던 것은 신기루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내리는 선택은 좋고 나쁜 것을 떠나 살면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이 될 수 없었다. 내게 부족했던 건 세상이 짜 놓은 판에서 벗어나 큰 그림을 내려다보는 경험이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나라는 존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좋다고 여기거나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물론 찾아볼 수 없다. 삶을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한 후에야 내릴 수 있었다.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얼마 없는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며, 절대로 오래가지 않는 만족감을 추구하는 길을 걸을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지 않은 외부적 목표와 규칙은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지 선택해야 했다. 내가 고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현자들은 후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규칙이라고 해서 무조건 맹신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찾았다. 그게 나에게도 맞는 길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취미도 있고, 남들처럼 돈을 벌어서 관리비도 내고, 맛있는 것도 사 먹는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던 의문은 이제 없어졌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다니지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도구처럼 사용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을 얻고 나자 표면적인 일상은 거의 변화가 없음에도 상담을 받아도 나아지지 않던 마음의 불안이나 깊은 밤까지 나를 괴롭히던 고뇌가 마치 전생의 일이나 된 것처럼 멈췄다. 물론 종종 다른 사람들로부터 왜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는 한다. 아마 누구라도 스스로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동정 어린 시선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력이나 인내로 극복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들과 나는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뿐이지 내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세계에선 나처럼 게임판을 벗어난 장기 말이 의아할 뿐이며, 마찬가지로 나도 한 걸음도 밖으로 내딛지 않는 사람들이 이제는 생경하다. 만약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스스로 생각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향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아직 임계점을 맞이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고전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과 걱정을 뛰어넘었던 때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가장 괴로워했던 시기였다. 무슨 시도를 하더라도, 그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갑갑하고 괴로웠고 어떤 물질적인 보상과 만족감도 그 괴로움을 덮을 수는 없다는 것이 적어도 나에겐 사실이라는 것을 완전히 경험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자 깨달음을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그제야 오래도록 붙잡아 온 오답을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으며 밀고 나가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뒀고,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았다고 해서 나의 선택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여지는 열어두고 싶고, 그래서 내 선택이나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일일이 납득시킬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만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정답이라고 제시한 것이 나에겐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번거롭지만 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기로 했을 뿐이다. 누군가 지금은 전혀 괴롭지 않냐고 물어보면, 때때로 지겹거나 약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금방 스쳐 지나가고 곧 평온을 찾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남들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 두려우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이제 전혀 두렵지 않다. 성공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을 전부 내려놓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이유를 모르고 괴로워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삶에서 벗어난 것이 나는 더없이 다행스럽다. 그래서 남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고 해서 시련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연연하지 않고 삶이 던지는 여러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전보다는 훨씬 잘 맞는다.
앞서 제시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삶을 사는 방식은 사실 딱 두 가지이다. 주어진 규칙 속에서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 나와 하나씩 나의 방식을 정립해가며 살아볼 것인지를 언젠가는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보기로 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엄청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배운다. 또한 어릴 때 일찍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판밖으로 나서는 순간 나의 나이라든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여태까지 무엇을 해왔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깨달음에 늦고 이른 게 있을 수 없고 승자와 패자가 있을 리는 더더욱 없다. 모든 것이 허무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도 괴로움을 넘어설 수 없으면 판에서 빠져나와 객관적으로 삶을 관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선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