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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Nov 15. 2021

판단의 이면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인과관계를 믿는 편을 선호한다. 어떤 사람이 전교 1등을 한 건 그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고, 또 어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그만큼 정부나 국민들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등이 그 예시이다. 만약에 상당한 빚을 내어 공격적인 투자를 한 끝에 평범한 직장인이 평생 일해도 거머쥐지 못할 큰돈을 얻게 된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판단할까? 물론 대부분은 그를 훌륭한 안목을 가진 투자자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앞선 예시에서 투자가 단순히 안목, 즉 지식이나 재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유수의 경제학자들은 모두 돈방석에 올랐어야 한다. 하지만 이름을 날린 경제학자 중에 투자에도 성공한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투자의 성공 여부는 투자자의 탁월한 결정에 달린 것도 맞지만, 시장 상황 등 환경적인 변수도 많은 역할을 한다. 복합적인 요소들에 의한 영향을 받는 사건을 성공이나 실패로 이분화해 단순하게 접근하면 개인의 뛰어난 자질을 우상화하거나 어수룩함을 비웃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에게 유익한 진리를 알아내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일에 확실하고 직접적인 원인을 들 수만 있다면 세상사를 예측하기가 쉽겠지만, 진실은 언제나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가 가진 정보는 언제나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성향에 따라 언제나 최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사건에 영향력을 끼치는 요소를 전부 파악하는 일은 슈퍼컴퓨터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몇 가지 굵직한 정보에 따라 판단 내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둘째로, 우리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원인을 찾는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해서 시간 순서로 몇 가지 굵직한 사건들을 나열하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 위기가 터진 후에 수많은 전문가가 달라붙어서 도출한 해설에 불과하다. 위기가 터지지 않고 무사했을 수도 있는 근거를 찾아보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을까? 무사히 넘어갔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이유는 무시된 채 위기의 원인만이 역사에 기록된다. 그러나 경제가 휘청이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 심지어 주요 의사결정자들조차 그 조짐들을 무시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상사나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정보에 한하여, 이미 정해진 결론을 뒷받침하는 원인들을 선별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어떤 일에 대한 인과성을 납득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해석에 대한 시도가 무용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건에 대하여 결론을 확인한 후에 그 근거를 뒷받침하는 원인을 찾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언제나 결론이 먼저이고, 원인을 찾는 것은 나중이다.


    이런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편협해지기 쉽다. 모든 일이 확실한 원인과 결과의 연계에 의해 발생한다면, 사람이 겪는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한 책임은 선택을 내린 본인이 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내린 선택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기보다는, 여러 상황적 조건에 의해 옳은 선택으로(혹은 덜 옳은 선택으로) 나중에 판명될 뿐이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모든 일이 유기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보이고, 그래서 종종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이 왜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야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복잡한 요소들이 뒤얽힌 그물망 같은 세상에서 누구도 어떤 일이 생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수많은 미실현의 가능성을 제치고 단 한 가지 발생한 경우를 우리는 운명이라 부르기 좋아하지만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판단과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다는 숙명론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성공이나 실패가 예정되어있다고 믿을 이유도 없으며, 무척 명확해 보이는 사건도 실상은 훨씬 복잡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면 편견과 편협함은 줄어들고 전체를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세상사는 대개 편의에 의해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축소한 간편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차분히 앉아 지나간 일에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떤 편견에도 흔들리지 않고, 또한 미래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함부로 예측하지도 않을 수 있다. 아무것도 단정 짓지 말고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이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스스로 상기시켜야 한다. 지나친 확신이나 분명함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판단력에 독이 될 수 있으니, 보이는 것보다 넓게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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