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인생이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통찰했다. 특정한 욕구가 있지만 이를 아직 충족하지 못한 상태는 고통이며, 반대로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이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그는 직관적으로 누구나 나쁘다고 보는 고통뿐 아니라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한 권태까지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권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하며 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를, 더 나아가 계속해서 존재하기를 갈구하지만 마침내 존재를 온전히 확보하여 아무것도 갈구할 것이 남지 않게 되면 자기 존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中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불만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고,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이른바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된다. 그 때문에 원하는 것을 대체로 다 이루어 그다지 갈구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라고 여기기 쉽다. 사회가 양극화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고충을 호소하면 배부른 소리로 취급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권태를 운이 좋은 몇몇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가볍게 넘기기에 쇼펜하우어의 지적은 충분히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욕망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충족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극한 행복인가? 그렇지 않다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궁극적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도 괴로움의 쳇바퀴를 구르게 된다는 급진적인 주장은, 표면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는데도 무기력과 좌절에 발목 잡히는 현대인이라면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시계추의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일시적인 권태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항상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실제 대상, 즉 값진 물건이나 명예, 합격이나 승진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뭔가 좋아 보이는 것을 갈망하는 태도이다. 원하는 대상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곤 하지만, '무언가 내게 아직 없는 것을 원한다'는 근본적인 자세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라면, 표면적으로 모든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될까?
진실은 인간이 늘 '고작 이게 전부인가?'라는 의문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원하는 것은 삶의 의미일 수도, 또는 스스로도 유치하다고 여기는 내밀한 소망일 수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종류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고통을 의식적인 욕망의 좌절이라고 본다면 반대로 권태는 무의식적인 소망의 좌절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은 내가 손에 넣고 싶은 것을 넣지 못하는 상태이며, 권태는 그러한 욕망이 모두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의 허무에 대한 조용한 슬픔과 분노이다.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막상 갈구하는 게 모두 사라지면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대로 "존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여 얻을 수도 있는 세속의 욕망과 달리, 살아간다는 일의 끝없는 허무를 채워주고자 하는 근원적 욕구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른다. 그 혼란에서 도망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새로운 몰두의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 세계라는 익숙한 전장으로 걸음을 돌리고 시계추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놓친다.
독일의 철학자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쳇바퀴 같은 삶을 살 운명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할 것이고, 설령 모든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하더라도 지극한 만족은 없을 것이다. 유일한 편법은 도망치지 않고 존재의 공허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 충족될 리 없는 심원한 갈망과 씨름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현실이라는 시계추의 굴레에서 잠시라도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