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교시 Jul 21. 2023

나의 부끄러움을 씁니다.

일학년 교사의 시간, 일교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망설이다가 그 망설임마저 부끄러움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2014년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내리 10년간, 그 이전부터였겠지만 나 역시 교권하락의 길을 걷게 됐다. 좋은 학생도 좋은 부모님도 좋은 관리자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수한 상황이거나, 어떤 특별한 존재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학교에서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못하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 교실의 현장이다.


 2023년 7월 18일 서울 모 초등학교에 발령받은 지 채 얼마 되지 않는 선생님 한분이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것을 하루가 지난 7월 19일 밤 10시가 넘어서야 알게 됐다. 그때 당시만 해도 하루의 긴 시간이 허무할 만큼 인터넷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일부 교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근조 화환 함께 동참해요.' '카톡 프사를 애도 프사로 바꿔요.'등의 댓글만이 간간히 표류하고 있었다.


 내 카톡을 열어봤다. 친구 리스트에서 애도 프사가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망설였다. 그랬다가 그 찰나의 망설임이 부끄러워 프로필을 바꿨다. 그러다 두려웠다. 듀얼프로필 설정에 들어갔다. 친구 추가되어 있는 학생들 카톡을 하나하나 선택해서 듀얼프로필로 돌렸다. 어쩌면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때 내가 항변할 수 있는 보루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렇게 프로필을 바꿀 수밖에 없어서 나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지금부터는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내가 신규였던, 지금보다 조금은 교권이 덜 무너졌을 때의 일이다.

 1학년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나에게 학부모님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희 아이 기초조사서 보셨어요?"

"아, 혹시 누구 아버님 이실까요..? 제가 지금 입학식이 끝나서 아직 볼 겨를이 없어서요."

"잠시 얘기 좀 하시죠. "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설명을 기초조사서에 빼곡히 쓰여있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아버님이 가신 뒤 입학식에서 서른 명 가까운 학생들이 낸 각종 돌봄, 기초정보조사서, 스쿨뱅킹 동의서 등 10가지 넘는 바구니별 서류더미에서 그 아이의 기초조사서를 찾아냈다.


 사건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친구가 메롱을 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그걸 몰랐던 나에게 도대체 수업시간에 뭘 했냐고 했다. 미처 보지못했으니 지도하겠다고 했다.

 하루는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는데 그 원인이 나라고 했다. 내가 그 아이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죄송하다고 더 신경 써서 챙기겠다고 했다.

 또 다른 날은 어떤 친구랑 놀고 싶지 않아 하는 아이인데 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혼내는지를 물어보셨다. 그 아이를 혼낸 적은 없고 전체를 대상으로 친구를 괴롭히면 칭찬스티커를 못 받는다는 규칙을 알려준 적은 있다고 했다. 집에 갔던 학부모가 다시 찾아왔다. 학교 규정을 인쇄해 들고 찾아와 내 얼굴에 던지듯 들이밀었다. 학교규정에 없으니 학급 규칙을 없애라고 했다.

어느 날은 수업시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아버님의 손에는 체온계가 들려있었다. 아이가 아파서 열을 재러 왔다고 했다. 아버님의 발에는 내빈용 실내화가 아닌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수업 중에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 학부모도 출입증을 받아야 학교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일들은 입학한 뒤 한달 동안 일어났던 일 중 일부였다.


 그러한 과정들 그 아이와 관련해서만 하루에 한 번에서 많게는 하루 네 번 학부모의 학교 방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는 30명 가까이 되는 1학년 아이들의 교사였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시달리며 나는 "내가 교사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나는 교사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내가 무능한 줄만 알았다. 밤낮없이 울려대는 전화에 '애도 없는 교사가 부모 마음을 어떻게 아냐.' 혹은 '네가 그러고도 선생 자격이 있냐?'는 학부모님이 고함에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경험이 없었다. 그만두고 싶어서 의원면직서를 가슴에 품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관리자분은 한숨을 쉬시더니 짜증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내게 얘기하셨다.


 "정 힘들면 하루 쉬세요."


 내가 원한 것은 하루 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출근을 했다. "내가 누구랑 아는 사이인 줄 아냐!"며 교장실로 찾아온 학부모님에게 "좋게 좋게 넘어가자, 사과하라."는 관리자의 종용도 있었다. 가슴에 불덩이가 생겼다. 살도 점점 빠졌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동료 교사들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일부는 내가 신규라서 관리를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말할 사람이 필요했고, 정신과를 찾아갔다. 정신과 선생님이 얘기하셨다.


 "왜 그렇게 당하고 살아야 해요? 학부모한테 그냥 얘기하면 안 돼요?"


 위로의 그 말이 되려 상처가 됐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정신과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퇴근하는 길 학교 앞 횡단보도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봤다. 차들은 많았는데, 세상에 나 홀로 서 있었다. 눈물은 마른 지 오래였다. 트럭을 보고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저 트럭 기사님은 무슨 죄야.' 혹은 '학교 앞인데 애들이 보게 되면 민원 들어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불현듯 '내가 죽으면 그 아버님이 보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죄책감에 고통스러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저었다.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무서웠다.


 며칠 뒤 다시 학부모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생활기록부를 자신과 상의해서 써야 하니 성적 마무리 전 미리 보여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가슴속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교무실로 향했다. 그만두는 게 안되면 휴직을 하겠다고 했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빌었다. 학기 중 휴직은 (학부모의 민원으로) 어려우니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한 달 휴직을 내라는 답변을 간신히 받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교실로 향했다. 나이스를 켜고 생기부를 썼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생기부 마감을 했다. 그렇게 방학이 되었고, 내가 간절히 얻어낸 휴직이 무색하게 아이는 방학기간에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후에 알게 된 건 두 가지였다. 15년 경력의 선생님이 한 달 만에 병휴직을 내셨다는 사실과 그동안 내 수업을 모조리 학부모가 녹음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의 교직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비슷한 학부모님을 몇 차례 더 만났었다. 내가 직접 만나기도 했고, 주변에서 보기도 했다.




 교직경력이 조금 더 쌓인 지금에서야 적어도 '그때의 일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혹시나 서울 모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혹은 10년 전의 나처럼 자살을 생각하거나, 교직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이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그때는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는 저도 제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겠습니다. 그리고 그건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의 괴로움이 영원할 것 같지만 모든 일에도 끝은 있어요. 선생님의 눈물과 고통이 멈추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며 '맘에 안 들면 다른 직업 구하겠지.'라고 한다. 혹은 그런 상황이라면 왜 교사들이 들고일어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무원에게는 집회의 자유가 없을뿐더러, 갑과 을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들에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직업을 쉽게 바꿀 수 있고, 할 말을 다 하며 살아갈까? 특히나 직업 하나를 바라보며 12년 정규교육과정을 마친 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대학교를 다닌 사람들 중에서 말이다.


 누군가의 인권을 올리기 위해서 누군가의 인권을 깎아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교사이든 학급에 있는 다른 어린이든.


                                       깊은 애도를 표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전 19화 아픔이 있는 교사는 아이들을 통해 빛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