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하는 베이킹
"엄마, 크리스마스엔 베이킹을 해야죠."
12월 25일이 휴일이고 싶은 엄마 그리고 밀가루로 뭔가 만들고 싶은 딸.
애플파이의 예쁜 엮기 모양 덮개를 보고 며칠 전부터 딸은 애플파이를 만들고 싶다 한다.
24년 전 신혼집 옵션으로 있었던 쁘레오 4구짜리 가스렌즈 아래에 연결된 거구의 오븐.
그 안에 있었던 요리책이 시작이었다.
나는 둥근 빵틀과 채, 브라운 거품기, 저울 등을 야금야금 사들이다가 케이크 돌림판에 스패튤라, 짤주머니까지 갖추게 됐다. 딸들 태어나기 전부터 딸기 생크림 케이크, 파운드케이크, 머핀, 초코칩 쿠키, 땅콩 쿠키, 브라우니 등을 만들어 손님을 대접하고 선물을 했다.
딸들이 태어난 뒤에는 빵틀에 약밥으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둥근 케이크 틀 아래에 칼로 빗살무늬를 그린 사과를 깔고 고구마에 플레인 요거트와 통밀가루 조금 넣어 만든 케이크, 두부와 견과류를 잘게 다져 구운 과자 등 어린 딸들이 먹을 수 있는 베이킹을 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홈베이킹을 해서 포틀락 모임에 참석했다. 산딸기 치즈 케이크, 조개모양 틀에 구운 마들렌, 아몬드가루 함량이 높은 반죽을 경단 모양으로 빚어 구은 후 슈가파우더를 묻힌 스노우볼 등등.
손재주 있는 딸은 나와 파트너가 되어 해외공구로 구입한, '찰리브라운과 친구들' 쿠키 스템프와 커터로 플레인 쿠키를 만들어 친구에게 선물하며 좋아했다.
나는 갱년기, 딸은 늦은 사춘기.
데면데면하기도 하고 어쩌다 말이라도 하게 되면 서로 조심스러운데 딸은 25일에 뭐 할 건지 자꾸 묻는다.
나는 그냥 쉬고 싶었다.
굽는 건 30분이지만 재료 준비, 도구 설거지에 뒷정리까지 하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작업이다. 이건 웬만큼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시작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의욕이 없다.
딸이 도와줄 수 있냐고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한다.
넓지 않은 평수에 도구를 한 곳에 모아두지 않아, 머릿속으로 확인 작업을 시작한다.
싱크대 구석엔 밀가루 채와 파이틀, 달걀물 바르는 붓.
요즘 사용하지 않는 오븐에는 밀대와 식힘망, 스텐 스크레퍼.
베란다에는 파이 상자와 리본.
알아서 했으면 하는 바람에 베이킹 도구 위치를 알려주자
"엄만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도와주기 싫다는 거예요?"
딸이 도끼눈을 뜬다.
모녀 사이에 있는 깊은 강을 건너려면 신뢰를 쌓아야 하는데 아차 싶었다.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건 내 입장이고 딸이 바라고 느끼는 건 다르니까.
사자와 소가 결혼한 우화가 잠깐 사이 스친다.
사자는 짐승을 사냥해 소에게 주고, 소는 정성스럽게 차린 풀 밥상을 사자에게 차려 주지만
결국 서로 바라는 바가 달라 오해만 쌓이다 헤어졌다는 이야기.
"그래, 뭐부터 도와줄까?"
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듯 재빠르게 도구를 꺼내 씻어 마른 수건으로 닦는다.
딸은 내가 언질한 대로 밀가루와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찬 버터를 손으로 만지지 않고 스크레퍼로 완두콩만 하게 자른다.
반죽을 대강 한 덩이로 모아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서 30분간 휴지.
설탕을 은근한 불에 녹이다 갈색으로 캐러멜화가 되면 버터를 넣고 사과와 꿀, 시나몬 파우더를 넣어 조리다가 전분으로 농도를 맞춘다.
온 집안에 달큰한 시나몬 향이 가득하다.
밀가루로 파이 피를 만들고 사과 필링을 넣은 뒤, 긴 직사각형으로 재단한 반죽을 엮어 파이 지붕을 만든다.
반죽 위에 달걀노른자를 정성껏 바르고
예열한 오븐 200도에서 30분간 굽기.
딸은 뒷정리를 함께 하며 뜬금없이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증조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증조외할머니께
비질을 할 때는 내 집 앞만 하는 게 아니라
앞집과 옆집 자리까지 쓸어야 한다는 것(1.4 후퇴 때 외할머니가 증조할머니께 들은 말)을 배웠고,
외할머니에게서는 온화한 성품을,
엄마한테는 베이킹을 해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배웠어요."
베란다를 오가며 들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내 웃음소리에 딸이 활짝 웃는다.
먹음직스러운 황금갈색 윤기를 머금고 나온 애플파이.
한 입 베어 무니 기성품의 가벼운 단맛이 아닌, 풍미를 지닌 적당히 단 맛이다.
밀가루 사이에 버터가 공기층을 형성해 페스추리처럼 바삭 소리를 낸다.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수고를 칭찬하는 모녀.
나의 바람을 접었더니 딸의 마음이 오븐 속 파이 피가 필링과 어우러지듯 맛이 들었다.
지금, 우리의 관계도 익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