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잘 살아줘서 고마워
세 자매가 한 자리에 모이면
우리는 늘 같은 장면,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언니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어린 시절이 소환되듯,
우리는 오래된 기억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중 언니의 말.
"엄마는 할머니, 아버지 기새에 눌려 우리 4남매를 방관한 거지.
내가 일곱 살 때 유치원 끝나고 광명다리를 건너 개봉아파트까지 비 오는 날 혼자 걸어온 적이 있어.
할머니 병간호로 엄만 셋째를 업고 병원에 갔고,
네 살이던 둘째는 외갓집에 맡겼고.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천둥도 치고 깜깜한 거야.
무서워서 신발장 앞에 얼음처럼 앉아 있었어.
첫째여도 일곱 살은 너무 애기잖아.
난 첫째를 낳으면 절대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고,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
출판사 에이브, '큰 숲속의 작은 집'을 읽으며 알게 됐다.
초등학교 때 '초원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미드의 원작이라는 것을.
주인공 자매 중 첫째는 금발에 얌전한 아이, 둘째는 흑갈색 머리의 말괄량이.
첫째는 언니 같고 둘째 로사는 나 같았다.
두 살 터울 언니는 부드러운 갈색의 긴 머리에 하얀 얼굴, 쌍꺼풀이 있고
나는 유난히 노란 피부에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보통 사이에 끼인 아이들이 그러하듯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언니보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기를 해도 마지막 판에서
언니의 하얗고 긴 손등 위에는 공기가 다섯 알,
내 손등에는 세 알이 올라가
한 번을 이기지 못했다.
엄마는 자매를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내가 더 잘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뭐든 언니를 이기려하는 내가 염려되어 '언니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언니보다 1년 늦게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나는 큰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피아노방 밖에서
고개만 살짝 기울인 채
언니가 양손으로 치는 소곡집을 감탄하며 들었다.
언니가 말했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뭐라 했는지 알아?
'너는 4남매의 장녀니까 네가 잘해야 한다.
넌 양을 이끌고 있는 목자야'
내가 왜 목자니?
나도 양이지.
고 3까지 그런 말을 듣다가
대학교에 와서야 생각했어.
이젠 나를 챙겨야겠구나."
고 3까지 자기 안경테 하나 스스로 고르지 못하던
수줍고 소극적인 언니는
대학 가서 완전히 달라졌다.
민족 극회에 들어가 함께 연극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노드라마도 했다.
내가 알던 언니가 아니었다.
그렇게 언니는 개인주의로 살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뻔하니 포스터 붙이기, 과외 등 아르바이트 하며
장학금도 받고 등록금과 용돈 마련하고.
그 돈으로 유럽여행도 가고 연수도 다녀왔다.
유치원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초봉은 37만 5천 원이었다.
분당구 서현동에 분양받아 들어간 아파트는
목돈이 한 달에 20만 원씩 들어갔고
그 걸 내 월급으로 충당했다.
난 노래 테이프, 책을 사는 것 외에는
특별한 지출이 없었다.
좋은 옷을 살 여력도 없었지만
언니가 안 입는 옷,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옷, 의상 디자인하는 동생이 가져 온 샘플 등을 코디해서 입었다.
외국계 회사에 들어간 언니가
봉투 한 번 가져오지 않고 월급 전액을 적금에 넣고
상여금으로 생활비를 쓸 때
아버지는 내심 서운해했다.
나는 나대로 억울했다.
왜 언니는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나만 생활비를 보태야 하나.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언니의 개인주의를 부러워하면서도 못마땅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쪽 뇌는 기능을 멈춰야 했다.
언니는 그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았다.
대학 때 언니가 내 등록금을 한 학기 내 준 적이 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책임 물음'에 대한 것이지 않았을까.
내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부엌 다용도실 안에
3살 남동생이 갇혔다며
언니가 자는 나를 깨웠다.
문을 함께 힘껏 열다가
언니와 내가 넘어졌고
바로 옆에서 팔팔 끓고 있던 보리차가 내게 쏟아졌다.
집에는 할머니와 4남매만 있었다.
놀란 언니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찬 물을 한 번 붓고
어찌할 바를 몰라 울면서 등교했다.
나는 안방에 신음하며 누워있었다.
"에고, 어떡하냐. 어떡하냐..."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탄하며
내게 다홍색 담요를 덮어주었고
옷을 입은 채 담요 안에서
내 살은 익어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랜 입원생활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밤마다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그 사고는
우리 가정에서 무언의 비밀이 되었고
나는 자매들과도 그 일로 인한 어려움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혼 후 세 자매가 모두 30대였을 때
우연히 내가 먼저 집단 미술치료를 받았고
동생과 언니는 내 소개로 나중에 참여했다.
어느 날 여동생이 전해준 언니의 말.
"아빠는 나 때문에 동생이 다친 거라며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했어요.
그 말이 내 인생에서 너무 무거웠어요."
언니는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며 울었다고 했다.
나는 몸이 아팠고
언니는 마음이 아팠구나...
목이 메었다.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그건 언니 책임이 아니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
혹시 그 일로 마음의 짐이 있다면
이제는 내려놔도 돼."
전화기 너머에서 언니는 말이 없었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진 않았다.
불안전하게 살아
다 자라지 못한 부모,
그 부모 아래에서
서걱서걱 자라 중년이 된 세 자매.
아버지는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버거워
열 살 딸에게 책임을 물었고
우리는 그렇게 그 시절을 지나왔다.
언니 소식은
여동생을 통해 듣는다.
성격도, 살아온 세월도 달라
살갑고 다정한 자매는 아니어도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언니,
잘 살아줘서 고마워.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조용히 지지해 주고
힘이 돼 주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