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정원-나의 첫 컬러링북
"우와~~~ 내 동생이 작가라니…(고깔모자 쓰고 웃는 얼굴 이모티콘 3개)"
교보 POD로 출간한 나의 첫 컬러링북을 가족 톡방에 소개하자마자, 미국에서 언니의 톡이 날아왔다.
언니가 감정을 담아 이렇게 길게 보낸 건 처음이다. 게다가 물결과 이모티콘까지. 평소 ‘응. 고마워.’ 정도가 언니의 스타일인데, 언니의 반응에 나는 멈칫한다.
다음 날 올라온 아버지의 톡.
“참 어려운 일을 했다. 딸아, 참 대단하구나. 축하한다.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누가 보면 사시에 합격한 줄 알겠다. 평소 나와 교류가 거의 없는 아버지. 나는 톡 내용을 두 번, 천천히 곱씹어 읽는다. 그러다 오래도록 내 안에 묻혀 있던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대, 눈보라 치던 어느 겨울이었다.
대학생 때도 외박 금지였던 나는 MT라도 가게 되면 아버지와 실랑이할 걱정에 한숨부터 나왔다.
어느 날, 친구 초대로 캠프에 가겠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크고 네모난 금테 안경을 콧등에 내려쓰고, 쌍꺼풀진 눈으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 눈빛.
빛바랜 연주황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아버지는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호통치듯 말했다.
“쓸데없이 거긴 왜 가냐? 그런 데 가려면 돈 들어가지. 많이 벌지도 않으면서. 딸 중에 네가 제일 처지지.”
정확한 문장이 아니어도 대충 이런 뜻이었다.
유아교육과를 나와 고졸보다 적은 월급으로 시작해 고만고만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아버지께 참가비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잔치하듯 툭 튀어나온 그 마지막 말.
‘딸 중에 네가 제일 처지지.’
나는 방으로 돌아와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내 물건 중 가장 값나가던 바이올린을 들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오후가 되자 함박눈이 되었고 바람까지 거세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때 내 인생처럼.
격려 없이 자란 나의 앙상한 자존감은 아버지의 한마디에 ‘케세라 세라’가 되었고 나는 향방 없이 걷고 있었다. 결국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돼지고기 김치찌개로 저녁을 차려주었다.
평소 알코올 냄새도 싫어하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마실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아버지의 권위가 아닌 권위주의에 지친 언니는 아버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마이 웨이’의 삶을 선택했다. 여동생은 다 받아주는 듯 넉살 있게 말했지만 나중엔 분노가 뒤따랐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었다. 진실은 통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못됐다.”
“고집이 세다.”
“덤빈다.”
“그래서 누가 좋아하겠냐.”
그 말들이 독화살처럼 혈관 속에 하나하나 박혀, 나는 남성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일종의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어릴 적 사고로 병원 생활을 오래 했고, 자라서도 자주 아팠던 둘째 딸. 가족 모임에서도 자신 있게 나서기 어려웠던 나의 포지션. 특별히 좋은 일은 없고, 유독 나쁜 일만 종종 있었던 나였다.
아버지의 톡에 답을 쓰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결국 하트 표시 하나만 달아두고 휴대폰을 닫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엄마께 안부전화를 했다.
엄마는 내가 답문이 없어서 아버지가 섭섭해했다고 전한다. 응? 아버지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별명, 괜히 붙은 게 아니었구나.
아버지는 평생 책임감으로 불균형한 내면을 감추며, 어린 자식들에게 매서운 칼바람을 날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와 전화기 사이로 큰 소리가 오갔다.
“그래, 넌 톡을 봤으면 답문을 해야지.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않냐?”
잠시 쉬면서 배웠던 영상 제작 과제로 엄마를 인터뷰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엄마의 희로애락을 듣고, 마지막엔 아버지와의 결혼생활 중 감사한 점을 서로 표현하며 분위기 좋게 마무리했었는데—
“이건 왜 하는 거냐? 돈이 돼? 쓸데없이.”
농담인지 농도 짙은 진담인지 모를 그 말.
나는 아버지 무릎을 살짝 치며 거의 외치듯 말했다.
아니, 그건 말이라기보다 ‘습관적 반사’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 쓸데없다는 소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았는데!”
뱉어놓고 보니 나도 당황스럽다.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단서를 달았던 아버지. 소심한 내게는 끔찍했던 말투.
지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의 여전한 그 말, 그리고 그것에 작동하는 내 감정.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오래 묻혀 있던 에피소드가 지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까.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에게 아버지는 위로도, 기대어 쉴 언덕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든 아버지 도움 없이 살아보고자 버티고 버텼다.
‘제일 처진 딸이 되기 싫어서.’
내 잠재의식 속 어린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인정을 바라고 있었고, 삶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차라리 외면하고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소통전문가 박재연 강사의 말을 빌려 굳이 마음의 번역기를 돌리자면, 아버지의 말은 아마도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네가 아프다고 쉬는 게 걱정된다.
힘들지 않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에 잘 다녔으면 좋겠다.”
아마 그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버지 전기를 쓰며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다”라고 적었던 나.
그런데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냉기가 느껴졌다. 25년 전 이야기를 풀어낸 지금, 마음에 남아 있던 얼음은 결국 녹아 눈물로 떨어져 내린다.
이제 나는 나를, 그리고 당신을 조금은 이해한다.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건네는 뜨거운 포옹.
그 온기로 나는 오늘 한 뼘, 더 큰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