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해,"생일 축하해!"

by 주연

초등학교 5학년 12월의 밤이었다.

두 살 터울의 세 자매는 일곱 식구가 둘러앉을 수 있는 큰 직육면체 상을 펴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있었다. 물감과 색연필로 산타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추리, 종 등을 그리고 조심스럽게 색칠하던 참이었다.


7살인 막내 남동생이 누나들 곁을 오가다 무엇인가를 건드렸는지, 순식간에 4남매 사이에서 큰소리가 났다. 옆방에 있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호통을 쳤다. 내 행위와는 상관없는 억울함.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런 억울함이 겹겹이 쌓여 있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날.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다섯 살 제제가 크리스마스에 구두닦이 통을 어깨에 메고 걸으며 생각하듯.
‘크리스마스에는 아기 예수님과 악마가 태어난다는데, 나는 악마가 분명해.’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다가도 생일 달이 되면 막연한 불안이 안개처럼 스며든다.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그 불안은 짙어지고, 마침내 그날이 되면 축축해진 영혼을 이끌고 하루를 버텨야 했다. 차라리 생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일곱 식구가 북적대고 내 한 몸 편히 쉴 공간도, 다정한 축하도 기대하기 어려운 집에서 맞는 생일은 늘 살얼음판 같았다. 물론 미역국은 먹었고 할머니 살아계실 적엔 오래 살라는 뜻을 담은 수수팥 경단이 상 위에 오르기도 했다.


사연 많은 청상과부로 독자를 장가보낸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 아들을 낳고서야 사람 대접을 받았던 엄마의 삶도 녹록지 않았지만, 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점쟁이 말에, 온 동네가 둘째는 아들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기대를 저버린 아기.


"엄마, 나는 왜 이렇게 고아 같은 마음일까.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누군가는 태아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기도 했다.


2.5킬로그램으로 태어나 방구석에서 울고 있던 나를 할머니와 아버지는 외면했고, 엄마는 산후조리도 못 한 채 울었다고. 20살 중반을 지나서야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들은 이야기였다.


삶을 이렇게 살아오고서 왜 굳이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 징징거리듯 적어 내려가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사냐건

웃지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마지막 연처럼, 나도 웃으

"강냉이가 익걸랑 와 자셔도 좋소"

말하며 살고 싶었다.


내 안에서는 두 목소리가 늘 맞선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배부른 소리 아냐?'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


'어떻게 그러니?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어. 나 자신조차도.'


물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듯, 내 삶 역시 다 알 수 없는데 어찌 함부로 재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나를 이해해보려 한다.


생일이란 꼭 케이크와 선물, 요란한 축하여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런 자리가 불편하다. 대신 친구의 메시지는 참으로 반가웠다.


"사랑하는 내 친구~생일 축하해!

참 대견하고 멋진 너를 보면서 한 그루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억센 비가 와도 눈보라가 쳐도 꿋꿋하게 잘 이겨내는...

이 땅에 태어나줘서 고맙고 내 친구로 살아줘서 고마워."


스무 살에 만나 삼십 년을 넘게 함께한, 아무 말 잔치를 벌여도 안심이 되는 친구.

『사랑과 우정의 신비』에서 조지 엘리엇이 말한,

'적절히 거름망으로 걸러 알아듣는' 바로 그런 친구다.


아침에 눈을 뜨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조물주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날. 그래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은 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게 되었고, 삶의 책임은 내 몫이지만, 거대한 빅 피처 속의 작은 존재라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보물지도를 펼쳐 하루하루 '의미'라는 보물을 찾는 삶.

빅터 프랭클은『죽음의 수용소』에서 말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상황을 견뎌낼 수 있다.


모든 것이 박탈된 환경에서도

단 하나 남은 자유가 있다.

'그 상황에 대해 내가 취할 태도를 선택할 자유'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삶의 의미가 된다.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질풍노도가 내 안에 있지만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먼저 걸어간 이들의 사유를 빌려, 나는 오늘도 다시 살아간다.


비 오는 금요일.

퇴근 후 문화센터에서 양재 수업을 듣는다.

바닷빛 천, 앞에 맞주름 세 개를 잡아 만든 치마.

밑단을 세발뜨기로 마무리하며 한참을 손바느질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온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잘 살아왔어."

그렇게, 내 생일을 자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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