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담백한 목소리
모녀 관계를 애증 관계라 부르기도 한다. 나에게 엄마는 친구 같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아버지와는 애증관계다. 고아로 자랐지만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의 엄마는 다혈질에 강성인 아버지와 청상과부로 잔소리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네 남매를 키웠다. 그냥 키웠다. 결혼 초 함배기에서 외풍 심한 방, 병아리키울 때 서로 붙어있다 압사할까 염려돼 병아리 옆에서 잠잘 때처럼.
마음을 나눈다거나 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내 마음 한켠 외로움의 등불은 꺼질 줄 몰랐다. 대화 안 되는 남보다 못한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며 어스름한 저녁빛이 창가에 그림자를 그릴 때면 알람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전화로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울컥해서 아무 말 잔치를 벌이다가 내가 왜 보고하듯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하며 의아해했다.
"엄마, 전신마취를 여덟 번 하고 이 정도 살면 잘 사는 거 아냐?
기억력도 사고력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
"어머나, 그렇게 많이 했니?"
안쓰러운 엄마 목소리. 나는 사 남매 중 유일하게 사고, 맹장 등으로 수술 경력이 많다. 엄마와 나는 맞장구를 치며 지나간 시간을 소환한다.
8세 때 화상을 입고 신체의 3분의 2 이상이면 위험하다는 소릴 들으며 화상전문 병원이 아닌 동네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나의 병간호와 집에 있는 시어머니, 고만고만한 세 남매를 돌보느라 먼 병원은 생각도 못했다고. 그래서 아직도 후회한다고.
사고 이후 어려서 2번 수술을 했고 25세 즈음이었다. 아버지가 전기 관리하는 화상 전문 성심병원에서 이식수술을 하자고 권했다.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나를 아버지가 불렀다.
"내가 치사하고 더러워도 왜 그 병원 전기관리를 그만두지 않았는지 아니?
너 수술시키려고. 직원 할인해서 2천만 원에 해준다고 해서. 이제 준비됐으니까 수술받자.
너 여덟 살 때 다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했다."
나를 항상 긴장하게 하는 권위주의 아버지. 칭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대화가 핀잔 일색인 아버지. 나는 불편하게 살아도 되니까 다신 수술 안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했다'는 아버지 말에 결심이 무너졌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진료를 받고 과년한 처녀가 수술대에 올랐다.
다 큰 딸이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엄마 수발받는 게 가시방석 같았다.
"아냐, 엄만 기쁨으로 해서 안 힘들어."
나를 간호하랴 집안 일 하랴 바빴던 엄마의 답에 조금은 안심이었다. 그렇다. 나는 고아 같은 외로움이 있었지만 그 시절 엄마는 내게 웃고 있었다. 엄마 없는 집에 청소기라도 돌리며 집안일을 도왔다는 아버지는 입술이 부르터서 병문안을 왔다.
간절히 바랐던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과 언어는 기억에 없다. 고만고만한 형편에 아버지는 병원비 마련하느라 근검절약의 강도를 높였을 것이다. 회피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무거운 공구가방을 들고 추우나 더우나 차도 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기 관리를 했던 아버지. 하대하는 곳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집에서 풀기도 했다. 그것으로 어린 자녀들은 아프기도 하며 그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을 살아냈다.
출가외인이 돼서도 나는 아픈 손가락이다.
삶이 고단해서 자주 했던 안부전화를 안 하니 엄마가 전화를 했다.
다리가 아픈데 어린이집 교사로 출근하는 딸이 안쓰러워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던 엄마. 아버지 눈치를 보며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으면 하는 바람을 넌지시 비친다.
"엄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들 쓰며 사는 거지.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 아버지한테도 아무 말 말고."
"네 말 들으니까 안심이 된다."
건강과 경제에 대한 담담한 나의 소신을 밝히니 엄마는 한결 환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이틀 뒤 밤 10시가 지나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아버지가 얼마 보냈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하지 말랬잖아. 아쉬운 소리 하기 싫고 아버지 뭐라 하는 말도 듣기 싫어."
"아버지가 그냥 너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보내셨대."
내게는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이다. 이제는 뭔가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소릴 들으며 살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내가 책임지며 마음 편안게 사는 게 우선이다. 내가 아프거나 사정이 생겨 직장을 그만 두면, 걱정 많고 예민한 성격의 아버지 반응이 내겐 스트레스였다.
다음 날 심호흡 한 번 하고 아버지 번호를 눌렀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 목소리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그간에는 엄마를 통해 보청기 낀 아버지의 안부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 왜 보내셨어요? 내가 알아서 한다고 엄마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 아무 말도 안 했어. 병원비를 내든 너 필요한 데 쓰라고."
전화기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백하고 잔잔했다. 나를 평가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난 아버지께 얼마 전 넘어진데 괜찮은지, 다치면 바로 병원에서 사진 찍어야 한다는 말, 내일 눈 오니까 외출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금까지 간간히 아버지 도움 받은 적이 있다.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맘이 편하지마는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는 팽팽한 긴장의 끈이 느슨해졌다. 노구의 아버지와 중년의 딸이 평가자와 평가받는 자가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 대면했다. 상대의 어떠함을 헤아리는 여유. 마음속 어린 내가 비로소 어른에게 보호받고 성장해서 나도 누군가에게 어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긴 듯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날의 통화가 시작이었다.
자녀와의 관계가 팽팽해지는 걸 어찌하든 해결하고 싶었다. 내게 아버지의 잔상이 보일 때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 그날 이후였다. 오랫동안 얼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작은 물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딸은 자기 요구에 긴장하지 않는 엄마 마음을 느꼈는지 평소 안 하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보고 배우지 못한 부모역할, 책을 보고 강연을 들으며 잘해보고자 애썼는데 이제 때가 된 것일까.
엄마로서의 나, 최선을 다했을 부모님의 삶을 더 이상 판단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가 아니었다. 조건 없는 수용으로 기댈 언덕이 되는 것. 아버지가 전해 준 여유가 이제 내 자녀에게도 흘러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