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음식은 조림이 아니었다

나다움을 닮은 한 그릇에 대하여

by 주연

평소 요리에 관심이 있어 진심어린 아음으로 '흑백요리사'를 시청했다.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음식에 담아내는 이들의 서바이벌. 언뜻언뜻 보는 중에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봤던, 고요한 그림체 같은 최강록 셰프가 눈에 띄었다. 2013년에 마스터셰프 코리아 2 우승, 2026년 흑백요리사 시즌 2 우승. 그의 화려한 수상 기록과 달리 그의 모습은 놀라면 동그란 안경테처럼 더 동그래지는 눈이 수줍은 곰돌이 같았다. 자신의 요리를 설명할 때 정성스러운 과정을 표현하려다 끝을 흐리고 당황하는 모습. 그래서 더 응원하게 되는 매력 있는 요리사.


그의 요리인생 시작이 내일은 초밥왕이었다니 우직한 만화 캐릭터 같은 그의 인생과 어울린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들이 나에게 정직과 진실, 진심이 통하는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용택의 '삶은 당신을 닮아간다'에서 읽었던 구절과 어울리는 사람.


.조림왕, 조림핑, 연쇄조림마 등 인내와 소신이 필요한 조림 요리로 승부수를 내다 마지막 관문은 자신을 위한 요리였다.

자신을 위해선 라면밖에 끓인 적이 없다 하니, 요리사의 인생도 고객을 생각하는 정신노동이 한몫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시작하자마자 깨페이스트와 칡전분을 1대 1 비율로 넣고 물과 소금과 국간장을 넣어 중간불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열심히 휘젓는다. 2층에서 사복을 입고 바라보는 동료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나온다.

"저거 하기 힘든데, 계속 젓고 있네."

셰프의 감이 올 때까지 저어가다 직육면체의 용기에 넣어 굳힌다. 가쓰오부시 국물에 남은 닭뼈를 구워 넣고 듬성듬성 파를 썰어 넣어 육수를 낸 후 성게알을 호박잎에 싸서 깨두부 사이드에 놓는다.


깨두부는 차게 먹어야 제맛이고 그날 다 소진해야 한다. 다음날은 맛이 없어 영업이 끝난 후 남은 깨두부와 뜨끈한 국물을 함께 먹었다는 최강록 셰프는 이름 없는 이 음식을 소주와 함께 내놓았다. 노동주, 취침주라 부르며 하루 동안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위로의 정점.


"나를 위한 음식까지 조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10여 년을 잘하는 척하고 살아왔고 물론 원하는 맛이 나오기까지 수없이 연구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나를 위해서까지 조림 요리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안성재 심사위원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척하며 살았다는 답문을 한다. 그의 음식을 시식하고 어니스트한 맛이라며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한다. 최강록 셰프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준 것에 대해 눈시울이 붉어진다.


대문자 I 성향인 그는 말로 자신을 표현할 땐 느리고 어눌하기까지 하지만 요리를 통해 웅변을 하는 듯했다. 우리 모두에겐 가장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글일 수도 그림일 수도 운동일 수도 있다.

나에겐 무엇이 있나.


대학 때 나의 별명은 '날으는 메모지, 워킹펜, 비놀리아(오랜만에 봤는데 여전히 뭔가를 쓰고 있어서)'였다.

몇몇 가까운 사람 아니고서는 사람 만나는 것에 에너지 소모가 많다. I성향에 HSP으로 살면서 단체는 여전히 힘들다.

사람들 틈 안에서 나의 피난처는 작은 노트와 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끼적이고 그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작년 12월에 교보문고에서 POD로 메시지가 있는 컬러링북(마음의 정원)을 출판했다.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대학 동창들은 '너답다'라는 피드백을 보냈다. 그림책을 좋아해서 도서관에 가면 아이들 사이에서 그림책을 보며 내가 그린 그림으로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우연한 기회에 책을 내고 나다운 모습에 근접한 듯해 한 보따리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마음 담은 결과물을 요리사의 정성스러운 요리와 비견할 수 있을까.

그 기쁨을 이어가려고 첫 책을 시작으로 다른 책을 기획하고 있다. 어린이 감정그림일기, 성품에 대한 메시지 컬러링북, 모건 슈워츠의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에서 힌트를 얻은, 빛나는 시니어를 위한 컬러링북.


지금 나는 갱년기의 폭풍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어 에너지가 많지 않다. 직장 갔다 와선 간단한 집안일과 잠깐의 독서, 브런치 날짜에 맞춰 글 발행하기도 바쁘지만 내 안에 꿈이 있어 뭔가 든든하다랄까.

호르몬 때문인지 지나온 삶의 조각이 나를 찌르면 아파서 뜬금포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쩌겠나.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것은 오늘 하루뿐인 것을.

맘에 흡족하지 않은 어제였을지라도 오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두드린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있는 우물 때문에,

밤하늘 별이 아름다운 건 어린 왕자가 있는 작은 별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했으니 나는 보이는 것만으로 말하지 않겠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만 나아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멈추고

그 결과에 대해 그냥 토닥여주련다.

가장 따뜻한 품은 내가 스스로 안아주는 품이니.


최강록 셰프의 조림 비법.

미림:청주:간장=5:4:1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미림 하나 사서 진득한 마음으로 최셰프의 조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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