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기에게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
악악 거리며 울던 동그란 눈의 유나가 힘을 빼고 내게 기댄다. 나는 두 손으로 유나를 기저귀 갈이 매트에 천천히 눕이고 응가한 기저귀를 갈아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와 헤어진 뒤 통곡을 하며 향방없이 아장아장 걷던 아이였다. 이젠 안심을 하며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울다가도 선생님의 위로 어린 손길에 눈물을 그치고, 그 작은 가슴을 나와 맞댄 채 숨을 고른다.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에 오는 건 아가들에게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큰 사건이다. 그 작고 빛나는 눈동자로 낯선 얼굴을 피하다가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은 겪을 때마다 새롭다. 30대 초반의 어설픈 초보 엄마였을 때 갖지 못한 여유로운 표정과 가슴으로 아이를 안을 때면, 그 시절의 내가 떠올라 잠시 멈칫하게 된다.
두툼한 기저귀를 하고 걷다가 멈춰 서서 얼굴 표정이 진지해지면 영락없는 응가 타임. 할 수 있는 말이 '엄마'뿐이라 그 이름을 부를 땐 잘 살야 한다. 눈꺼풀이 무거울 땐 '나 잠 오니 재워달라'는 신호. 자기 봐달라고 울 때의 소리와 놀라거나 아파서 우는 소리는 다르다. 관찰하고 이해하며 사귀는 시간은 작은 이와 큰 이가 다름없다. 오히려 작은 이는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나 큰 이는 선입견이 앞서다 보니 판단과 평가가 앞서기 쉽다.
내 아이 키울 때는 이 작은 생명을 어찌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응가 속에 이상한 것이 보이면 책에 나온 대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기저귀를 소아과로 들고 갔다. 아이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키워내야하는 의무감이 컸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진 못하지만, 자기 의지를 관철하고자 분투하는 만 1세 넘은 아기들과의 기싸움은 교사의 노련한 심리전을 요한다. 고집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기에, 감정적으로 맞서면 안 된다. 그 작은 존재에게 무슨 감정을 내세우나 하겠지만 밥 한 술 뜨지 못하는 아기가 혼자 먹겠다고 교사의 손을 한사코 뿌리치며 온 곳에 밥과 반찬을 흩어놓을 때, 기저귀 갈기 싫다고 울며 눕지 않으려고 버틸 때, 친구를 때리고, 장난감을 뺏고 이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되어 하염없이 전진만 할 때 맨붕이 올 때가 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5명의 아가를 책임지며 지내다 보면 1시간 이내 에너지가 고갈되기 십상이다.
그 작은 존재들도 타고난 성정이 있어 주체 못 할 에너지 혹은 강단으로 숨이 넘어갈 듯 때를 쓰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네가 그렇구나. 그런 존재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 또 그 아이에게 반응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를 이해해 가는 것. 모든 인생이 다르기에 이 교실에서 만나는 작은 몸을 가진 한 영혼을 만나는 것은 특별하다. 우여곡절 여러 살이가 있었건만 여전히 이 작은 존재와 마주하며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스무 살 초반 유치원 교사 1년 차일 때부터 알았다. 내가 발 들인 세계는 정신과 육체노동의 완벽한 조합이라는 것을. 최선을 다해 애썼는데 25년 넘는 시간 동안 깨달은 것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고, 그 경계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인생은 과유불급이기에 지금은 좀 더 단순하고 담백한 관계와 삶을 지향한다.
딸이 유아교육 전공을 택했을 때 마음은 반반이었다. 이 어려운 길을 딸이 굳이 가야 하나. 하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딸은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부모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또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지를 얻은 것이 좋기도 했다.
"엄마, 교육과 보육이 다 필요하잖아요. 이걸 합해서 뭐라 하는지 아세요?
'키운다'라고 하는 거예요."
맞다. 생명을 키우는 일이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배워가는 것. 그렇게 크는 거다.
큰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어린이집에서 만 1세를 맡게 됐을 때였다. 기저귀를 갈며 말로 대화가 어려운 아기들에게 이야기했다.
"ㅇㅇ야, 지금 기저귀 갈 거야. 잠시 기다려줘. 시원하지?"
다리를 쭉쭉 늘여주며 스트레칭을 해주니 아기가 웃었다. 그리고 나의 딸들이 떠올랐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입히고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던 종이 인형 같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 그리로 나의 아가들. 이렇게 눈 마주치고 웃으며, 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줬다면...무언가 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와 기저귀를 갈다 눈물을 쏟았다.
"내 아이에게 못했던 걸 지금 이 아기들에게 하고 있는 것 같아."
동료 교사가 말한다. 어쩌면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더 정성을 들이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물바람이었던 아기들과의 만남이 지금은 내 손녀를 보듯 푸근해졌다.
내 마음이 커진 걸까,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더 알게 된 걸까.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나와 아기가 함께한 이 시간이 서로를 조금 더 자라게 하길 바란다. 존중을 담아 몽실몽실 말랑콩떡 아가들을 따뜻하게 안고 다정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엄마 선생님이기에 더 애틋한 것일까. 내가 엄마라는 게 참 좋다.
오늘도 잠잘 땐 모두 천사가 되는 아가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자장, 아주 느리게 자장가를 불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