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쪽이 닳은 운동화

우리에게도 봄이 왔다

by 주연

수유역 1번 출구로 나가면 포장마차를 지나 신발을 수선하는 작은 공간이 있다.


구두 밑창을 갈려고 갔다가 뒤꿈치가 많이 닳은 내 운동화 구제할 수 있을까 싶어 사장님께 신발을 보여줬다. 신발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좋은 신발이니 수선하는 쪽으로 하자고 했다. 신발 양쪽이 바깥쪽으로 1cm 정도 기울어져 닳아 있어, 그 부분에 고무를 덧대어 평행을 맞추기로 했다.


내 발모양 때문인지 편안한 신발 찾기가 쉽지 않다. 우연히 발견한 연한 인디언 핑크빛 운동화를 몇 년 전에 샀다. 3년쯤 지나면서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오염이 생겨 페브릭 물감으로 진 보랏빛 색을 입히고 끈도 보라색으로 바꿔 신었다. 새로 산 운동화는 두 번인가 신다가 불편해 신발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다른 신발은 발이 아파 오래 신기 힘들어 수선 시간 3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까운 교보문고에 내려가니 긴 원목 탁자에 빈자리가 하나 남아 있다. 책을 읽다 반가운 마음으로 신발을 찾으러 갔다. 수선비 2만 원, 다시 내 품으로 온 신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


낯선 이 느낌은 뭘까.


신 바깥쪽이 닳아 있어 나도 모르게 발을 바깥쪽으로 기울이며 걷다가, 평평한 뒤꿈치로 걸으려니 익숙지가 않다. 기우뚱거리며 걷는 것이 정상인줄 알았다. 습관을 바꿔 제자리를 찾으려 하니 내부의 반발이 만만찮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걸으며 이 느낌에 적응하는 중이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다. 꽃잎이 날리는 이맘 때는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나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환한 표정에 위화감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학창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즐거운 소풍의 기억이 없다. 그저 간다니까 따라간 기억뿐. 포근한 바람과 향긋한 꽃향기에 마음을 기댄 적이 없어서, 긴장이 일상이 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편안히 시간을 공유했던 기억이 없다. 원가족이야 그렇다 쳐도 내가 이룬 가정에서도 늘 쫓기듯 살았다. 세월의 빠른 강물에 휩쓸리며 소풍이 주는 여유와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런 시간이 오히려 불편해 혼자 있을 곳을 찾았다. 비정상은 아니지만 건강한 상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왔다. 내 삶이 만들어낸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나에겐 파랗게 투명한 하늘보다는 잿빛 구름이 더 어울리는 줄 알았다.


오랜 친구같은 그 운동화를 신고, 망설이던 병원에서 작은 시술을 받고 나왔다. 진료받은 나의 용기를 칭찬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불안했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 시간 습관적인 불안감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다.


기우, 노파심.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나의 친할머니는 생신 몇 달 전부터 손님 걱정을 했고, 아버지는 사 남매의 교육비를 이유로 콩나물 한 봉지까지 간섭했다. 우리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늘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 성향을 사 남매 중 내가 가장 많이 받았다. 신중하다 못해 시작하지 못하거나, 실수하면 안되다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들. 그 장면들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나는 얼마 전부터 나무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새들의 '우는 소리'가 아닌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저 함께 어울려 각자의 소리를 내는 것일까. 그 소리가 모여 화음이 되고, 내 안의 어떤 것과 공명해서 노래로 들리는 걸까.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는데, 하나 있다.


요즘, 몇 달 간 집을 떠나 있을 딸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며 우리는 서로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었다. 날카롭던 집안의 긴장이 많이 풀렸고, 조심스러운 티키타카가 제법 늘었다. 지난 주말 아침에는 배드민턴 치고 싶다는 딸아이와 집 앞 공터에서 공을 주고받았다. 배드민턴 공이 우리의 마음인 듯 공기를 가르며 가볍게 날아올랐다. 나보다 키가 크고 에너지 넘치는 딸아이의 승. 자랑스러운 표정이 어릴 적 게임 이긴 후의 그것과 닮았다.


딸은 지금 도서관 1층 난 3층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금 뒤에는 벚꽃 가로수가 이어진 우이천을 따라 함께 걸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 딸은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피카추(불량식품이라 내가 무척 싫어했던)를, 난 떡볶이와 순대를 먹을 예정이다.


불가능하다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희미했던 모녀 관계가 선명해지고 있다. 꽃비가 내리는 나무 아래를 함께 걷고, 미소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모녀 사이에 부는 스산한 바람이 익숙해서 낯설기만 했던 계절, 우리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나는 절망도 희망도 아닌, 그저 그 자체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캔버스에 연분홍 꽃비를 그려 넣는다.


오늘은, 우리에게 찾아온 봄을 처음으로 온전히 누린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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