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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Dec 17. 2022

묵밥의 추억

엄마의 추억이 아이들의 추억으로....ㅎㅎ

엄동설한

내 어릴적 기억으론 겨울은 몹시 길기도 하고 춥기도 했다. 그리고 눈도 참 많이 왔던 것 같다.


 그 옛날 긴 겨울밤이면 우리 아버지는 야참을 잘 챙겨드셨다. 특히나 설날을 지내고 난 그 즈음엔 밤에 묵밥을 종종 드셨다. 우리집에선 설맞이로 두부같은 건 안 만들어도 메밀묵은 꼭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토리묵처럼 쫀득쫀득한 묵이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묵은 투박하고, 찰기 하나 없이 숟가락 닿는대로 뚝뚝 끊어지는 그런 질감이었다.


별다른 육수 없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채썬 메물묵을 넣고 김장김치를 쫑쫑 썰어 넣어, 깨소금 뿌리고, 참기름 넉넉히 두르면 뚝딱 완성되는 간편식 야참이었다. 가끔 밥도 한숟가락 첨해서 먹기도 하는 그런 음식! 우리집에선 그 음식을 칭하는 특별한 이름도 없었다. 양푼에 말아서 한그릇씩 담아주시면 한겨울 머리가 띵 할 정도로 차가운, 졸린 눈꺼플이 번쩍 치켜세워지고, 정신 싹 돌아오게 하는 그런 맛이었다. 그리고 그 맛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었다.


그런데 오래전 치악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울택상이 별미가 있다며 내 손을 잡고 이끈 곳이 산 아래 어느 음식점이었다. 그곳의 대표 음식이 묵밥과 파전이었는데, 묵밥이 뭔지 몰랐던 나는 한상 차려나온 메뉴에 웃음이 나왔다.

"이게 묵밥이야? 어머...하하하"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어렸을 때 집에서 먹었던 그 음식이 묵밥이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것도 인기리에. 비쥬얼은 좀 달랐다. 묵은 진한 갈색을 띠었고, 쫑쫑 썬 김치에 김가루가 잔뜩 올라가 그 위에 참깨소금이 소담히 올려진 모습에 육수는 동치미국물이 아니었다. 신기했던 건 이런 음식을 돈주고 사먹는다는 사실과 이름도 없이 먹었던 우리 엄마가 해주셨던 그 음식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은 추억의 그 묵밥을 만들어본다. 어제 찰랑찰랑하게 매끈한 도토리묵도 예쁘게 만들었겠다, 고명처럼 올릴 야채 몇가지와 볶음김치, 부족한 단백질을 채워줄 달걀지단만 예쁘게 만들면 된다. 거기에 다시마와 멸치로 진하게 육수만 낸다면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저녁 밥상이 완성되는 것이다.ㅎㅎ

다시마멸치육수


묵밥만 먹으면 너무 허해서 뭔가 아쉬우니까 오징어 잘게 썰어 넣고, 김치전도 한장 크게 부쳐본다.긴긴 겨울밤 야참은 아니지만, 야참같은 느낌의 저녁상을 준비해보는 것이다. 비쥬얼도 화려하게 말이다.

오징어김치전


냉장고속을 뒤져본다. 아! 마땅한 야채가 없다. 그 흔한 당근 하나가 없는 것이 야속하다.

보자! 애호박, 양배추, 양상추, 대파, 양파. 있는게 없네. 대충 머리를 굴려본다. 파릇한 식감을 위해 호박을 돌려깍아 채썰고, 양파를 껍질 벗겨 최대한 가늘게 채썰자. 그리고 계란을 깨서 흰자는 흰자대로 노른자는 노른자 대로 예쁘게 지단을 붙여보자. 거기에 구운김을 가늘게 채썰어 김가루를 대신하고, 묵은김치가 똑 떨어졌으니, 생생한 김장김치를 쫑쫑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아 준비하자. 묵은지 다 먹고 남아있는 속만 꾹 짜서 쫑쫑 썰고 오징어를 넣어 되직하게 밀가루 반죽을 하자. 묵은지가 떨어지니까 여러모로 많이 아쉽다.

탱글탱글 도토리묵
예쁘게 올라갈 고명들

30분이면 충분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시간.

보기에도 화려하게 예쁜 묵밥이 완성되었다. 번개불에 콩궈먹듯 마음은 부산했는데, 차리고 보니 그 부산함은 사라지고 정갈함 가득한 한상이 완성 되었다.

쫄깃한 도토리묵이 크게 한몫한다.


"엄마! 파는것 같이 정말 맛있어요" 우리 큰아들이 하는 최고의 찬사다.

들인 공은 한시간인데, 먹는데는 15분이면 족하다. 후루룩 후루룩 술술 넘어간다.


"얘들아! 만두국에 밥 한숟가락 말아 먹듯이 묵밥에도 밥 조금 넣어 먹어야 더 맛있어!"

우리 택상이 한마디 거든다.


이런 날 또 빠지면 서운한 엄마의 한마디 "애들아! 너희는 정말 엄마 잘만난 줄 알아! 알았어?"

아~ 저기 저기 또 귀닫는 녀석 하나 있네. ㅋㅋ


그렇게 따뜻하고, 즐거운 웃음이 가득한 우리집 저녁 한끼가 추억속으로 아로새겨진다. ㅎㅎ

2022년 12월 16일 금요일

묵밥 만드느라 정신없었던......그러나 뿌듯함에 늘봄 쓰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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