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세 책 :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을 읽고
* 본 서평은 이음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막 태동했거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분야를 공부하는 일은 늘 어렵다. 번역서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늦게 나오거나 뒤처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I 분야를 예로 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예컨대 레이 커즈와일의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가 2025년 6월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을 때, 일부 독자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원서 『The Singularity Is Nearer』가 2024년 6월에 나왔으니, 1년 사이에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류세 책 -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원서 『The Anthropocene: A Multidisciplinary Approach』는 2020년 11월에 출간되었다. 당시엔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선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으며, GPT를 비롯한 생성형 AI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인류세’라는 이 살아있는 학문을 배우는 데 이 책이 과연 도움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충분히 도움이 된다.”
『인류세 책 :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은 인류세라는 복합적 현실을 단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들은 인류세가 과학에 기반한 개념임을 전제하면서, 이 거대한 곤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과학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이 협력하는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후술 하겠지만, 이 책에서는 시각예술, 음악, 종교, 윤리, 심리학, 그리고 시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는 해당 분야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인류세에 대해 이 분야가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밝힌다. - 참고 p.40)
이 책은 특히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접근과 다학문적 접근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한다. 간학문적 접근이 여러 분야의 지식을 통합해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수렴하려는 방식이라면, 다학문적 접근은 서로 다른 학문들이 각자의 관점과 방법론을 유지한 채 공통의 주제를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이다. 저자들은 인류세가 단일한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기 때문에, 통섭(Consilience)을 지향하는 간학문적 접근은 오히려 문제의 다면성을 훼손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반면에 다학문적 협업은 시도는 인류세를 단순한 환경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전체적인 이해에 다가갈 수 있다.
제1부(1장 ~ 6장)에서는 인류세의 과학적 토대와 인간이 행성적 존재로 부상하게 된 과정을 다룬다. 지질학적 증거들(지층)을 통해 인류세의 지질학적 실체를 밝히며, 동시에 기후변화와 생물권 전환을 중심으로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준 영향의 규모를 보여준다.
제2부는 인류세 위기의 근원을 사회적 동력에서 찾으며, 무한 성장을 전제한 근대 경제 체계와 정치 구조를 비판한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해결책만으로는 부족하며, 권력과 자원의 재분배, 인구 안정화, 복원력 있는 제도의 구축을 통해 ‘완화된 인류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다시 2020년으로 돌아가보자. 2020년에는 기후위기도 오늘날보다 심각하지 않았고, 인류세라는 개념 역시 논쟁적인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인류세 책: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은 이 [인류세라는] 현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을 소개하고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분야 안과 밖에서 치열한 논쟁과 이견과 충돌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밝히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떻게 소통이 가능했고 왜 협업이 필요했는지이다.
- 9p (옮긴이의 말 中)
2020년 당시 수많은 갈등 속에서 나온 인류세라는 개념을 구체화 및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망라한다. 인류세에 대한 오해를 붙잡기 위해 서문부터 "인류세에 대한 10가지 오해"라는 글을 덧붙일 정도이다. (이 부분은 유익하니 꼭 읽어보시길)
하지만 그런 세 저자의 철두철미한 부분은 오늘날 지금 단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지질학 및 지구과학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책을 가지고 다른 이음출판사 서포터즈랑 토론을 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통되는 이유는 너무 과학적 정보가 과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루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그 어떤 책보다 상세하게 다룬 과학적 부분이기도 하다. 인류세를 잘 모르는 독자가 인류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인류세를 기존에 알고 있는 독자가 관련 지식을 더 단단하게 하고 싶다면, 2020년 논쟁의 시기로 돌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2020년의 시점으로 논쟁 있는 인류세를 다시 살펴보자.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내가 든 감상 중 하나가, 이 책을 먼저 읽고 나서,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디페시 차크라바르티)를 읽었으면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당시 차크라바르티 책을 읽을 때 역사학 쪽 부분의 이해가 어려워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인류세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인류세는 근대적 사고의 기반을 흔들며,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붕괴된 새로운 현실 속에서 기존의 통합적 지식 체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술했듯이 다양한 학문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통합하려는 통섭의 논리를 따르는 간학문적 접근을 지양해야 한다. 그렇기에 각 학문이 고유한 방법론을 유지한 채 협업하는 다학문적 접근을 지향해야 한다. 또한 인류세는 무한한 성장과 진보에 대한 근대적 환상을 비판하며, 지구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용은 특히 7-8장에서 많이 다뤄진다. 독서토론에서 한 학우는 7-8장을 극히 추천했는데, 이러한 이유였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대인 인류세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미타브 고시는 분야를 세밀하게 나누고, 지식을 고립시키며, 인간의 선택이 행성적 한계라는 제약에서 자유롭다고 믿는 근대성의 지적 토대 위에서는 인류세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리라고 말한다. 고시가 보기에는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이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때다. - 66p
우선 상상되지 않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 보자.
널리 알려진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대안보다 세상의 종말을 떠올리는 편이 더 쉬워졌다. 그러나 대안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20세기의 꿈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지금,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한다.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 모든 것을 사변하기』, 16p)
일부 학자들은 인류세의 단일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하거나, 특정 파벌(백인 영국 남자들)이 증기기관을 무기처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214p) 그만큼, 인류세와 자본주의는 필수불가결적인 관계이다. 이제 인류세―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근대성에서 벗어나서 상상을 해보자.
정령론자보다 합리주의자의 세계관을 선호해야 하는지, 혹은 왜 시보다 숫자를 선호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한 지금, 전문성을 확보하고 증거를 검토하기 위해 기존 학문의 엄격함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학문이 자기 성찰을 통해 인접 분야뿐 아니라 먼 분야와의 협업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세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되 각자의 렌즈를 사용하여 지식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 51p
책에서 읽은 가장 재미난 부분이었다. 왜 정령술로 인류세를 설명할 수 없는가? 책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시각예술, 음악, 종교, 윤리, 심리학, 그리고 시(41p)로도 인류세를 다룰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여러 오솔길을,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인류세를 정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서적은 학술적 성격을 많이 띠기에, 이걸 읽을지 고민하는 독자층은 아마 학자 혹은 이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인류세가 무엇인지 엄밀하게 정의하고, 또 나아가야 할 (과거의) 예측 및 비전을 살피게 되는 기회는 매우 소중하다. 후자의 경우, 옛 비전을 떠올리는 것은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잊힌 옛 선구자의 강령을 성공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의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 서평의 서문에서 전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 떳떳하게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읽어도 되는가?
그렇다. 꼭 읽으시길.
위 책의 저자 사진들.
왼쪽에서부터 Julia Adeney Thomas, Mark Williams, Jan Zalasiewicz이다.
『인류세 책 :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
지은이: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 마크 윌리엄스, 얀 잘라시에비치 / 옮긴이: 박범순, 김용진 / 출판사: 이음
한줄평: 인류세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별점: ★★★★ (4.0 / 5.0)